2022/03/27 12:48

스펜서 극장전 (신작)


<재키>에 이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실존 여성의 이야기로 <스펜서>를 만든 파블로 라라인. 이번에도 화면비는 1.66:1이고, 주인공은 부담스럽다 못해 괴롭기까지 한 공간 안에서 자신의 삶을 간신히 버텨내는 것으로 묘사 되며, 의상이나 소품 등을 비롯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여전히 아름답다. 다만 <재키>와 <스펜서>가 다른 것. <재키>가 재클린 케네디를 해부하는 영화였다면, <스펜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헌사를 바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는 점. 

그로인해 고통받았던 실존 인물이 엄연히 존재했기에 이런 농담조의 이야기가 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스펜서>는 말그대로 지구최강의 시월드가 무엇인지 기어코 보여준다. 세상에 마상에, 안동 하회 마을 양반 집안이나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는 것 정도가 가장 힘들 줄 알았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영국 왕실로의 시집이라니. 거기서 부터 이미 숨이 턱 막힌다. 여기에 왕실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부담감도 분명 있지만, 별 괴상하고 희한한 이유들을 갖다 대며 전통이라 포장 해둔 그 심보가 스펜서의 고통에 더 불을 지핀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잘 보냈다는 증거로 왕실의 모든 사람들은 그 며칠 동안 몸무게가 늘어 나야만 하는 것. 하루 세끼 식사와 크리스마스 연회 스케줄 등, 개인의 자유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일정. 심지어는 옷도 마음대로 못 입는다. 그래도 왕실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이애나가 직접 겪었을 그 심적 고통에 관객으로서는 호러 영화 보는 듯 조마조마해 진다. 아니, 호러까진 좀 과하지 않나 싶지만 진짜로 적어도 심리 스릴러 정도의 장르 구분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

그리고 그걸 묘사해내는 연출들이 훌륭하다. 짐짓 멋지고 고풍스럽게만 느껴지는 영국 왕실은 그 식사 준비 마저도 군대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특유의 고여있는 딱딱함이 부각된다. 스트레스 때문에 섭식 장애를 겪어 음식을 제대로 먹기는 커녕 진주를 무슨 알약 먹듯이 집어 삼키는 다이애나의 모습 역시도 인상적이다. 여기에 <재키>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이 여전히 너무 훌륭하고... 샤넬에 대규모 협찬받았다는 의상들을 비롯해 포르쉐 올드카 등등의 당시를 묘사한 소품들이 인상적이다. 압박감이 엄청난 공간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름답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왕실 별장 묘사도 엄청나고. 

하지만 <스펜서>는 여전히 <재키>와 같은 문제점을 공유한다. 일종의 이미지적 도취가 그것이다. 소신발언 좀 해보자면,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을 심도깊게 묘사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녀를 통해 몇몇 영화적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영화일 뿐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는 거다. 한 인물의 겨우 며칠 만을 통해 그 전체 일생을 유추하게끔 만드는 이야기 구조와 연출은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가 서사 보다는 너무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품고 있는 분위기 만으로 스스로가 '시네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고통들 대부분의 이유는 모두 영화 바깥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대사나 분위기 등의 간접적인 묘사를 통해서만 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일단 내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해 솔직히 잘 몰랐거든. 게다가 가뜩이나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는 내내 뮤직비디오 또는 CF스러운 장면들로 인물의 내면을 설득해내려고 한다. 제일 대표적인 건 다이애나와 매기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 장면. 갑자기 둘이 차 타고 나가 춤추고 달리는 이미지로 일관한다. 심한 말일 수도 있지만, 카페나 와인 바에서 한쪽 벽면에 프로젝터로 소리없이 틀어줄만한 영화 정도가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그 태생부터 시각 매체이니, 언제나 이미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말했듯, 내 개인 취향은 항상 '서사'에 가 닿는다. <스펜서>는 아름다운 작품이고, 충분히 멋진 작품이다. 또한 영화의 모티프가 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실제 삶 역시 예뻤던 동시에 마음 아플 정도로 비극적이었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영화 자체는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것. <재키>도 그랬고, <스펜서>도 그렇고. 아무래도 파블로 라라인은 나랑 잘 맞지 않는 연출자인 듯 싶다. 

덧글

  • 잠본이 2022/03/28 13:23 # 답글

    어차피 주인공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들 알고 왔을테니 대충 알흠다운 화면이나 잘 보고 가세요라는 마인드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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