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4 11:00

야차 극장전 (신작)


오프닝을 보고 솔직히 좀 감탄했다. 홍콩에서의 액션이 멋져서? 아니. 촬영과 조명의 톤 앤 매너가 죽여줘서? 뭐,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니. 그럼 대체 뭘 보고? 그건 바로 설경구가 연기한 주인공의 캐릭터성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한국에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급 대중영화의 주인공인데, 모두가 보이게 마냥 옳은 선택만 하는 주인공이 아니잖나. 그는 시작부터 기습을 하고, 별다른 설명없이 사람들을 마구 죽인 다음, 자동차로 길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둔 뒤에, 자신을 배신한 옛 동료를 추격해 반쯤 쥐어팬다. 그리고 어김없이 겨누어지는 총. 그래, 나는 솔직히 여기서 주인공이 못 쏠 줄 알았어. 명색이 대중영화 주인공인데 어느정도는 착하게 굴어야 할테니까. 결국 그 옛 동료를 죽이게 되더라도, 분명 그가 야비한 행위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는 뉘앙스로 가게 되겠거니-했지. 하지만 설경구의 야차는 그딴 거 없고 그냥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정확히 나는 여기서 부터, 이 영화를 기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전쟁같은 스포작전!


영화도 스스로가 주인공으로 삼은 캐릭터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던 건지, 이야기를 원칙주의자와 실리주의자 사이의 구도로 풀어낸다. 박해수가 연기한 지훈은 방법론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원칙을 고수하려 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검사로서 오랜 기간에 걸쳐 재벌 사냥에 나섰음에도, 그 과정에서 팀원들이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모든 걸 놔버린다.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사람. 반면 설경구의 야차는 오프닝에서의 선택이 이미 잘 보여줬듯, 현장에서 구를대로 굴러 방법론 보다는 결과론에 치중하게 된 실리주의적 인물로 그려진다. 법정에 세우고 사법 심판 이딴 게 어디있어, 후환이 걱정되니 배신자는 그냥 즉결처형 시켜야지. 내어주지 않고 받아올 수 있는 게 세상에 어디있어, 남의 정보 사려면 우리 정보도 적당히 좀 팔아줘야지.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 두 주인공의 이러한 구도는 흡사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의 박해수는 그 영화의 에밀리 블런트이고, 이 영화의 설경구는 그 영화의 조쉬 브롤린과 베네치오 델 토로를 섞은 인물인 것이다. 여기에 비록 깊숙하게 다루고 있진 못하지만 첩보 세계에서의 데굴데굴 현장직과 책상물림 내근직 캐릭터들이 섞여 등장함으로써, 이러한 원칙주의 vs 실리주의의 구도가 조금 더 명백하고 재미있게 그려지는 측면 역시 존재한다. 조금 유치하지만, 정의는 정의롭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천명하는 영화 속 대사가 그런 부분들을 잘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 

하지만 정말 아쉬운 건 그 이후 부터다. 암만 생각해도 설경구의 야차 캐릭터는 끝까지 독고다이로 갔었어야 했다고 본다. 대의를 위한답시고 자잘한 희생들을 그냥 감수하려 드는 위험한 인물로. 의리 넘치는 인물이라 인간적으로 멋지기는 한데, 그 아래 팀원들을 살뜰히 챙기고 앉았으니 오프닝의 그 카리스마와 내가 기대했던 캐릭터성이 많이 휘발되는 느낌. 아니, 무슨 유비 관우 장비야? 어떻게든 지켜야하는 게 정의라고 일갈하는 판국에 팀원들은 왜 이리 잘 챙기는 건데? 여차하면 오랜 시간 같이 보낸 전우들도 버리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인물이었음 더 재밌었을 것 같다. 북한측 정보원과 연인 관계 아닌 연인 관계로 지낸 것도 알고보니 다 작전의 일환이었음과 동시에 그냥 빡빡한 현장에서 욕정 풀려고 만나는 것이었으면 더 속물적이고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 중반부터 전형적인 대중 영화 속 주인공의 길을 걷는다. 한없이 정의롭고, 한없이 인간미 넘치는 인물로만 그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가 갖고 있던 가능성들이 마구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챙긴 것 치고는 팀원들의 활약과 그 배분 역시 아쉽다. 작전 상황에서 각 캐릭터들 사이의 주특기 배분이나 캐릭터성 갈라치기가 좀 더 잘 됐더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지금은 그냥 어디서 많이 본 것들의 하위호환 리메이크 같다. 애완동물 데리고 다니며 유아적으로 구는 철없고 혈기왕성한 막내, 말수 없고 터프한 장발 수염남,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부관 등. 다 어디서 본 것들이잖아. 그걸 또 잘 했으면 몰라, 지금은 그냥 유치하기만 하다. 그리고 주특기는 진짜 좀 구분지어주지. 운전 담당 하나 시켜준 뒤 카체이스 하나 넣어 신들린 운전 실력 보여주고, 또 어떤 이는 저격 전문이라 멀리서 후방 지원하는 등. 지금은 그냥 팀원들이 하나의 덩어리처럼만 느껴진다. 그 점에서 양동근의 캐릭터가 제일 아쉬운 부분. 캐릭터가 확실한 배우를 데려다가 이토록 재미없게 써먹는 것도 죄라면 죄다. 배신자 기믹을 넣어준 건 뻔하더라도 나쁘지 않은데, 액션에서의 뭔가 활약을 더 끌어냈으면 어땠을까 싶음. 

이미 칭찬이 자자한 촬영과 조명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마음에 든다. 하지만 편집이 종종 그 무드를 망친다. 기깔나게 찍으면 뭘해, 편집이 다 망치는데. 어떤 쇼트들은 리듬보다 좀 더 짧거나 길고, 심지어 때때로는 동선도 이상하게 붙는다. 예컨대 촬영은 앞서거니하고 편집은 뒤서거니하는 영화. 하지만 더 심각한 건 오락가락 각본에 얼렁뚱땅 연출...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있던 캐릭터들은 점차 재미없게 변모하고, 주요 액션 시퀀스와 반전 요소들의 연출은 말그대로 진짜 얼렁뚱땅이다. 그냥 퉁치고 넘어가자는 식이 많음. 역시 가장 심각한 건 영화의 클라이막스 속 야차 vs 디세븐 격투 장면이겠지. 너네 총 들고 설치다 왜 갑자기 맨주먹으로 싸우는 건데...? 아, 자존심 때문에? 사나이들의 결투라서? 근데 왜 또 막판에는 결국 또 총 드는 거야... 자존심도 없나...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가능성 있던 영화라 생각한다. 제작진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속편 예고까지 대놓고 해놨더라. 하지만 별로 기대는 안 된다. 일단 속편에서 더 나아질 기미 자체가 없거든. 이미 주인공 야차 캐릭터를 말아먹었잖아, 마냥 정의롭고 일차원적인 인물로 말야. 자기 앞 가로막는 것이라면 우리 편이고 남의 편이고 그냥 싹 다 치워버리는 불도저 같은 인물로 이 인물이 끝까지 남아있었더라면 1편이 별로였어도 2편에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이미 그런 주인공을 말아먹어서...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