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7 11:06

태어나길 잘했어 극장전 (신작)


비슷한 포지션인 <불도저에 탄 소녀>와 같은 날 보게 된 영화. 확실히 공통점이 많다. 한국에서 제작된 독립 영화라는 점, 젊은 20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 가족과의 문제가 있고 또 그 때문에 처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등. 아, 두 영화 모두 국내에서 기라성 같은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불러모았단 점 역시 비슷한 점. <불도저에 탄 소녀>는 부산 국제 영화제, <태어나길 잘했어>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과 잘 어울리게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소소한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러니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불도저에 탄 소녀> 못지 않게 <태어나길 잘했어> 또한 한국에서 만들어진 독립 영화로써는 굉장히 뻔한 영화라는 것. <불도저에 탄 소녀>의 어조와 다를 뿐이지, <태어나길 잘했어> 역시 춘희라는 주인공을 오지게도 괴롭힌다. 하지만 <불도저에 탄 소녀>의 주인공 혜영과 <태어나길 잘했어>의 주인공 춘희는 사뭇 다른 인물들이다. 혜영은 불도저 같은 태도로 극중 장애물과 그걸 화면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까지 모두 다 밀어버리지만, 춘희는 이름이 가진 어감 그대로 살랑살랑 봄의 기쁨처럼 관객들을 사근사근하게 대해준다. 물론 알고보니 그 이름, 봄의 기쁨이 아닌 봄의 계집이었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거야-라는 들장미 소녀 캔디의 태도로 버티는 주인공 춘희를 보고 호감을 갖지 않기란 어렵다. 다 부수고 밀어버릴 거야!-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혜영에 비해서는 훨씬 더 호감을 쉽게 산다. 물론 춘희가 가진 그러한 삶의 태도 역시 그동안 한국 독립 영화계에서 숱하게 많이 봐왔던 그것이긴 하다. 그치만 호감은 호감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뻔하더라도 이렇게 관객의 마음을 사버리면 할 말 없는 것이다. 

그 옛날 로버트 저메키스가 <빽 투 더 퓨처>를 통해 그랬고, 또 최근 셀린 시아마가 <쁘띠 마망>으로 그랬듯이 과거의 누군가와 만나는 경험은 언제나 의미있다. 어릴 적의 아빠와 엄마를 만나는 거 참 감동이지. 근데 <태어나길 잘했어>는 지금의 자신이 지난 어린 날의 자신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것 역시 뻔하다면 뻔한 시간 여행 설정이겠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따뜻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런 생각 한 적 있었거든, 그 옛날의 나를 만나면 그냥 꽉 안아주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런 점에서, 춘희와 주황은 내게 소소하고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영화에 제일 깊이 빠졌던 순간은 춘희와 주황의 장면들이었던 것 같다. 어리숙하고 촌스럽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사랑'이라는 것. 한 번 태어난 이상, 무조건적으로 행복해져야만 하는 우리란 존재. 그 존재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영화인 것만 같아 다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덧글

  • 잠본이 2022/04/27 13:21 # 답글

    https://en.wikipedia.org/wiki/One_Life,_Furnished_in_Early_Poverty
    어린날의 자신을 만나 격려하는 패턴이라 하니 80년대 환상특급의 '그때 그모습'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과거의 자신을 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변화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상징적.
    https://zambony.tistory.com/111?category=304172
    그때의 감명이 뇌리에 남았는지 이런 어줍잖은 글도 썼을 정도였죠.
    https://en.wikipedia.org/wiki/Walking_Distance
    50년대 오리지널에도 비스무리한 설정의 이야기가 있긴 한데 분위기가 정반대라 흠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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