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30 16:06

소설가의 영화 극장전 (신작)


한결같다는 말. 참 좋은 말이다. 어감도 좋고 뜻도 좋고. 언제나 항상 같은 모양새나 태도를 성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니. 다만 예술, 특히 영화에 있어서 한결같다는 말은 때때로 위험할 수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똑같은 일상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누군가의 창의성으로 촉발된 의외성을 경험하고 즐기는 것이 예술의 본질 중 하나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예술의 작가가 작품을 한 두 편도 아니고 수십편이나 내는 동안 내내 똑같기만 했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도. 맞다, 내가 보기엔 홍상수가 딱 그렇다. 

홍상수의 자기복제적 스타일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소위 예술가랍시고 자신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를 예의 없는 것과 혼동하여 타인에게 쏟아내는 식의 인물들 이야기. 물론, 그 자체로 충분히 값진데다 여전히 재미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준희가 오랜만에 조우한 책방 후배와 영화 감독을 따로 따로 만나 썰 푸는 장면들은, 그들 사이 과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긴장감 가득하게 느껴지거든. 

최근 <앰뷸런스>에 대해 이야기하다 어쩌면 마이클 베이가 작가주의의 최전방 수호자가 아닐까-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이클 베이가 제아무리 부수고 날뛰어 봤자, 이 계열 끝판왕은 결국 언제나 홍상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자신의 스타일을 관철시키다 못해 편자처럼 박아버린 감독이니. 게다가 홍상수는, 기어코 자신의 삶속 상황까지 계속 끌어안은채 영화로 달려든다. 그 부분에서는 마이클 베이가 오든, 트뤼포가 오든 아마 홍상수를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부분들이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나는 홍상수를 미워하지 않는다. 영화 바깥에서 그가 저지른 일들과 개인적으로 엮여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적어도 누군가를 죽였거나, 또는 누군가를 추행 했던 게 아니라면 1차적으로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홍상수와 김민희 사이의 일을. 둘 사이의 사랑과 미래를 위해, 다른 누군가와 함께했던 다른 사랑과 과거들을 홍상수가 끊어냈다는 것을. 그 점은 홍상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우리 모두가 알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 바깥의 사건들이, 영화 안으로 끊임없이 스며들어 온다. 그걸 끌고 들어온 것도 홍상수 자신이다. 극중 권해효가 분한 영화 감독이 김민희가 연기하는 영화 배우를 오랜만에 만나 왜 요즘 연기 활동이 뜸한지, 충무로의 많은 영화 감독들이 그걸 얼마나 아까워 하는지 아냐고 칭찬섞인 오지랖으로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건 영락없는 영화 바깥 김민희에 대한 세간의 평가들 아닌가. 다들 말했지, <아가씨> 찍고 이제 반등할 일만 남았는데 불륜 사건에 얽혀 대중적 이미지가 망쳐졌다고. 그래서 너무 아깝다고. 적어도 대중들 사이 여론은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김민희의 얼굴을 한 영화 배우가 뻘쭘한 표정과 어색한 몸짓으로 쭈뼛거리고 있는 사이, 그를 지켜보고 있던 중년의 작가가 오지랖에 맞서 오지랖으로 대항한다. 대체 뭐가 아깝게 느껴지는 거냐고. 자신의 삶을 마음껏 결정할 수 있는 엄연한 성인인데 왜 남들이 참견인지 모르겠다고. ......성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 있어서 그렇지, 이거 그냥 홍상수가 김민희에 대한 세간의 평가들을 모두 파훼 해주고 있는 거잖아. 결국 주인공 준희는 영화를 찍는 영화 감독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것도 김민희의 얼굴을 한 길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더 오그라드는 건 바로 그 극중 극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화면이다. 시종일관 흑백의 화면을 고수하던 <소설가의 영화>는, 극중 소설가의 그 영화가 공개 되는 시점에 이르러 오즈에 들어선 도로시가 목도 했던 것 마냥 컬러 영화로써의 전환을 선언한다. 근데 그 내용이 더 가관. 김민희의 얼굴을 한 길수는 영화내내 그토록 예쁘다 칭찬 했던 공원의 좁은 길을 걸으며 꽃을 주워내 자신만의 부케를 만든다. 웃긴 게, 그걸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님. 뜬금없이 등장한 중년의 여성이 갑자기 나타나 길수의 꽃꽂이를 돕는다. 여기서 내 머리를 내려치는 한 방. 아, 이거 감독이 배우랑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결혼식을 지금 여기서 이루려는 건가? 아니, 누가 봐도 그렇잖아. 그럼 저 갑작스레 등장한 중년 여성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설마... 설마......

작가나 감독이 작품 안으로 스스로를 끌어오는 것은 작가주의란 명목 하에 많이 거행되는 일이고, 또 작품과 상황에 따라선 기쁜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사회적으로 물의 아닌 물의를 일으켰던 감독의 매우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자기 변명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과거 작품들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과 지금의 상태에 대한 셀프 오마주. 돈 주고 극장에 앉아 그걸 본 관객 입장에서 이를 느끼하지 않게 여기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