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출적 측면이나 연기 등과 같은 작품의 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서 조금 미안한데, 그럼에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진짜 돈이 좋긴 좋다는 거. 애플의 탄탄한 자금력으로 제작된 <파친코>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해왔던 지금까지의 시대극 드라마들을 정말로 저만치 따돌려 버린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꾸렸으면서도 그 안의 디테일까지 챙겨낸 그 세심함. 그리고 그 모든 걸 가능케 만든 제작기획력. 최근 <Dr. 브레인>을 보고 긴가민가 했던 애플TV+였는데, <파친코>를 보고는 완전 생각이 달라졌다. 이른바, 진짜가 나타났다!
물론 할리우드에는 이런 TV 시리즈들이 꽤 많았지. 하지만 한국말 대사를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 시대극에서 이 정도의 퀄리티는 난생 처음인 것만 같다. 내가 영화에 비해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 규모 면에서는 역대급. 당시의 공간적 배경을 압도적인 풍광으로 재현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에 일단 놀랄 수 밖에 없다. 근데 한국 시청자로서 진짜 뒤집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특유의 그 디테일들. 조선반도에 배치된 일본 순사가 조선인들을 취조하는데 한국말을 쓴다. 헌데 그게 정말로 '어설픈 한국어'야. 일본인들이 진짜로 쓸 법한. 여기서 두 번 뒤집어지는 거다. 물론 이런 묘사 기존의 한국 시대극에서는 기본 탑재 항목이었지. 하지만 이건 국적으로 따졌을 때 미국 드라마잖아. 제작진들 대부분이 한국인 크루였겠지만, 어쨌거나 감독이랑 기획자, 제작자 모두는 미국인이잖아. 스케일과 디테일의 원투 펀치. 거기서 일단 넋을 반쯤은 놓고 보게된다.
기획제작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놀랍다. 아닌 게 아니라 화질이 정말로 좋은 느낌. 검색해보니 아리 알렉사로 찍었던데, 촬영 과정에서도 그렇지만 후반 과정에서도 화질과 음질에 신경을 꽤 많이 썼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지. 물론 아이폰 카메라로 찍은 드라마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애플이라면 카메라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또 홍보하는 회사 아닌가-라는. 소니나 캐논처럼 본격 카메라 회사까진 아니여도 하여튼 매 아이폰 신제품 발표 때마다 카메라 기술에 대해 대규모로 홍보하는 회사잖아. 최근 아이폰 모델들은 4K 촬영은 물론 돌비비전까지 지원하는 추세던데. 한마디로, 주력 제품 중 카메라와 그 화질에 대한 코멘트가 많은 회사이다 보니 꼭 아이폰으로 찍은 것은 아니여도 자사가 제공하는 오리지널 콘텐츠에 의 기술적 측면에 신경을 많이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 거지. 여기에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애플TV 모델들 모두 4K 영상 재생하는 게 또 추세이기도 하고.
작품의 외적인 평가 위주로 먼저 말해봤는데, 본편 역시 훌륭한 편이다.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이 나눠 연출한 에피소드들이 각자 좀 구분되기는 한다. 코고나다는 전반적으로 좀 더 담백한 느낌이고, 저스틴 전은 그 연출이 그에 비해 확실히 감정적인 느낌. 근데 뭐 둘 다 작품 전반에 잘 어울려 달리 할 말은 없다. 편집 타이밍이나 프레이밍 같은 건 그 자체로 워낙 훌륭해서 더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다만 각본에 있어 그런 궁금증은 들더라. 이걸 왜 비선형적인 구성으로 풀어냈을까. 각각의 장단점은 있을 것이다. 선자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시대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행해나가는 선형적 구성은 일단 그 완성도를 떠나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었을 것. 하지만 또 그런 장점도 있을 테지, 천천히 누적된 인물의 행동과 감정적 궤적이 이후에는 큰 감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거. 반면 실제 드라마가 취한 비선형적 구성은 과거와 현재를 엮어 역사 속 인물들이 던진 말과 행동들이 이후 어떤 나비효과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인과 관계를 좀 더 확실히 강조할 수 있다. 확실히 덜 지루하지만, 확실히 더 산만한 느낌도 있고.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는 결국 선택 당한 비선형적 구성이 의미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무엇보다 선형적 구성으로 했으면 다른 시대극들과 큰 차이가 잘 안 느껴졌을 것.
걱정하고 또 기대했던 것에 비해, 일제의 만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드라마다. 뭐, 잔뜩 예상하고 봤지만 대단히 잔혹하고 냉담한 묘사는 별로 없던데? 물론 사람 묶어다가 개처럼 끌고 다니고, 그저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 태워죽이는 등은 충분히 비인간적이지. 천인공노할 만한 일이지. 그치만 그런 모습들을 아주 극단적으로 직접 묘사하는 건 아니더라고. 그 점에서 반쯤은 다행이란 생각, 또 반쯤은 아쉽다는 생각. 이후 시즌에서는 어느 정도 더 묘사될 거라고 본다.
요즘들어 부쩍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해 세대 간 갈등을 표현하는 작품들이 많아진 것 같다. 과도한 PC주의니 뭐니 비난과 비판들 역시 분명 많지만, 그럼에도 격세지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혐오와 분열을 조장 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극적 풍토가, 이제 와서 라도 조금씩 조금씩 이런 작은 노력들 덕분에 갈아엎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물론 언제나 말했듯, 그 의미 보다도 작품 본연의 재미를 챙기는 게 당연히 먼저겠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햄보칼 수가 없던 꽈찌쭈가 이제 여기까지 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햄보칼 수 있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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