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나무인형 피노키오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육체를 꿈꾸는가? 실로 많은 선배격 SF 영화들이 이미 숱하게 다루어왔던 주제. 그러나 <애프터 양>은 그걸 반대로 푼다. <A.I.>나 <바이센테니얼 맨> 등이 그랬던 것처럼 안드로이드를 주인공 삼아 스스로의 존재론적 가치를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 이야기를 풀지 않았다는 소리다. 반대로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던 남겨진 인간들의 소회로 그 안드로이드의 존재론적 가치를 되짚어 나간다. 그리고 이건, 굳이 안드로이드 소재의 이야기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라 생각한다.
생뚱맞지만 이소룡의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당신은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 나는 그 말이 정말로 맞다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신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이다. 그 어떠한 숭고한 목적이나 필생의 숙명 따윈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생물학적으로 잉태되고 출산 되었기 때문에 살아간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또 덧붙이고 싶다. '삶이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은 맞지만,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이 그 목적에 가까워 지기도 한다'고. 이 유치한 말은 순전히 내가 이소룡의 말에 숟가락 하나 정도 올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우리네 삶이 그런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다뤘든 다루지 않았든 <애프터 양>은 흥미로운 텍스트로써 기능 한다. 안드로이드는 그저 아이를 돌보고 각 가족 구성원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디자인 되어 출시된 존재 아닌가? 그들의 목적은 원래 그렇지 않았나? 하지만 극중 남겨진 가족 구성원들은 이미 떠나버린 안드로이드 양을 추억하고 술회 하며 그의 그 원초적 목적 이상의 어딘가에 진짜로 참된 목적이 있었다 여기게 된다. 태어난 것, 아니 만들어진 것은 그러한 수단으로써였지만 결국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았냐는 거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삶.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봐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런 텍스트의 감동과는 별개로, 영화는 생각보다 되게 지지부진하다. 감독의 전작인 <콜럼버스>나 <파친코> 같은 경우에는 그 감정적 격량의 총합 차이를 떠나 그냥 그 자체로 재밌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애프터 양>은 조금 과격하게 말해 스스로에 자아도취 되어버린 영상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건 그냥 취향 차이일 수도 있음. 인서트로 가득찬 영화 좋아하기는 하지만, 근데 또 너무 인서트로만 가득 채운 듯한 감성빨 세운 영화는 내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 존나 까다롭지만 존나 사실이다. 그 기준에서 <애프터 양>은 나한테 과하게 정적인 영화로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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