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7 21:40

스토커, 2013 대여점 (구작)


박찬욱 필모그래피 깨기 9탄. 

바로 직전에 만들어진 <박쥐>는 뱀파이어 있는 뱀파이어 영화였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에 만들어진 <스토커>는 뱀파이어 없는 뱀파이어 영화다. 예민했던 나를 변화시키고 정체성을 확고히 만들어주는 것은 남이 찔러 넣은 외부의 피가 아닌 언제나 내 안에 흘렀던 내부의 피. 드라큘라의 귀족적 혈통을 싸이코패스 혈통으로 치환한 혈족 이야기. 그렇게 인디아 스토커는 찰리 스토커에 의해 어른이 되었다.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계속 반복되어 왔던 박찬욱의 '같은 상태로 부터의 공감'이 아예 전면적인 소재가 되어버린 경우라 하겠다. 전반적인 이야기 틀이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에 주로 연루되어 있음에도 온전한 박찬욱의 영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인디아의 직접적인 내레이션으로 묘사 되듯, 그녀는 아버지에게 강인함을 물려 받았고 어머니로 부터는 그 반대편의 유약함을 내려 받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해준 것은 바로 삼촌 찰리의 싸이코패스적 기질. 이쯤 되면 왜 제목이 극중 인물들의 성씨인 '스토커'인지 이해가 간다. 

인디아와 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 있는데, 다름 아닌 계단에서 이뤄진다. 계단. 소위 말하는 파워 게임을 은유하기에 썩 적절한 미장센적 오브제. 그 첫 만남에서 인디아는 계단 아래 위치해 있는데, 가만히 앉아 도피 중이던 그녀를 계단 꼭대기의 찰리가 부른다. 그리고 인디아가 계단을 오름으로써 완성되는 관계의 역전. 사실상 영화 전체를 요약 했다고 봐도 진배없는 훌륭한 씬. 좋은 장면은 또 있다. 처음으로 목격한 살인, 그리고 거기서 묻은 피와 흙을 씻어내기 위해 시작한 샤워. 엷은 신음소리를 내며 트라우마에 고통받아 우는 것 같았던 인디아는 알고보니 자위를 하고 있었다. 슬픔과 죄의식의 신음이 아닌, 흥분과 쾌락의 신음. 그렇게 인디아는 살인과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 장면 외에도 시공간을 촘촘히 엮어나가는 미장센과 몽타주가 훌륭할 정도로 섬세하다. 사실상 촬영과 편집으로 하고픈 말을 다 하고 있는 영화. 

고향 땅에서 만든 영화들이 워낙 큰 아우라를 빚어놔서인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 중 종종 '글로벌 진출용 일탈' 정도로만 치부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인식들이 아까울 정도로 영화가 너무 좋다. 필모그래피 초기작들에서 보이던 패기가 일종의 섬세함으로 전환된 것도 좋고, 그와중 또 기술적 부분에서는 확실히 만개한 것 같아 더 좋음. 아마 개인적인 순위로 나열하자면야 그의 영화들 중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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