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의 신작이자 그 필모그래피 정주행의 궁극적 이유였던 영화.
<스토커>와 <아가씨>는 플롯의 구성과 그를 수식하는 촬영, 편집적 측면들을 통해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인 인물들을 콜라주 하듯 엮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헤어질 결심>에 와서 박찬욱은 그 옛날 <올드보이> 때 그랬던 것처럼 아예 한 프레임 내에 인물들을 비현실적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그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는 <헤어질 결심>이 정통 멜로 드라마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더 힘을 받는다. 실제로는 저멀리 건너편 아파트에서 쌍안경으로 훔쳐보고 있는 것일 뿐이지만, 박찬욱의 그런 터치를 통해 해준과 서래는 마치 한 집에서 함께 오래 산듯한 부부로 보인다. 의심으로 시작된 관심, 관심에서 피어난 결심. 감히 말하건대, <헤어질 결심>은 <올드보이>와 더불어 박찬욱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작품이다.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하다는 게 대단하다. 팜므파탈에 가까운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남성 주인공이 펼쳐나가는 미스테리 추적 수사극. 대한민국의 형사라고 하면 바로 떠오를 만한 까끌까끌한 수염이나 더벅머리 등의 이미지를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해석한 지점 등. 아무리 보아도 프랑스나 미국의 고전 필름 누아르 속 탐정 영화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 그 형사 주인공이 쓰는 도구들은 죄다 21세기만의 것.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 등은 수사의 도구가 되고, 무선 이어폰과 핸드 크림 등은 애정의 도구가 된다. 수첩이나 두툼한 파일철로 뻔하게 묘사되는 형사 생활이 아니란 점이 재미있다. 그야말로 세련된 고전미.
보통 수사극이라고 하면 관객에게 전달해야할 설명이 많은 법.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은 그를 주인공들 입을 통해 직접 풀어냄으로써 설명을 대신한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 부분에서 엄청나게 시네마틱하다. 입씨름하는 설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의 것들을 다 시청각적으로 표현 해낸다. 때문에 촬영과 편집이 더 돋보이는 거고. 형사팀 회식 자리의 시끌벅적 했던 분위기가 일순간 해준 혼자만의 것으로 전환되는 편집 같은 경우도 그렇지 않나. 어찌 보면 뻔하고 단순한 편집인데, 딱 그거 하나로 저 인물의 현재 감정과 기분과 생각이 확 체감 되잖아.
기본적으로 사랑과 연애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체화 되는 그 무엇이다. 왜, 한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던 그런 썰도 있었잖아. 젓가락질에 서툴던 글쓴이가 여자친구에게 젓가락질을 제대로 배운 이후부터는 그녀와 헤어진 이후에도 한평생 젓가락을 쓸 때마다 그녀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고. 사랑은 그런 것이다. 상대에게 들었던 무언가, 보았던 무언가, 맛봤던 무언가, 배웠던 무언가, 겪었던 무언가가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것. 해준은 그렇게 서래와의 시간을 쌓았다. 산에서와 물에서 모두. 아, 우리의 만남이 여기까지일지언정 평생 당신이 나를 잊지는 못하게 만들겠다는 서래의 그 마음. 제대로 만나지도, 제대로 헤어지지도 못할 바엔 일평생 지독하게 얽혀들겠다는 애정어린 독기. 아마 해준은 영화의 결말 이후 오래도록 서래를 잊지 못하겠지. 아이스크림 먹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도, 어설프게 한국말을 쓰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도, 산에 갔을 때도, 바다에 갔을 때도.
그렇기에, <헤어질 결심>의 결말은 근래 들어 본 가장 아련해 슬픈 결말이었다. 나는 아마 오래도록, 이 영화의 결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몇해가 지난 이후에도, 아마 나는 이 영화를 박찬욱의 최고작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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