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5 12:09

극장전 (신작)


남편을 잃은 듯한 하퍼는 스스로의 마음을 치료하고자 작은 시골 마을로 향한다. 꿈에 그리던 정원 딸린 2층 집을 민박으로 얻어 시작된 시골 생활. 하지만 정원에 심어져있던 나무의 사과를 따먹은 게 잘못이었을까? 하퍼는 연이어 이상하고도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자신을 쫓아 달려오는 실루엣, 벌거벗은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의문의 남자, 여기에 만나는 족족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동네 사람들까지. 하퍼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힐링물을 기대하며 마을을 찾았겠지만 정작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미드소마>에 더 가까웠다. 


열려라, 스포 천국!


남편에게 당한 가스라이팅과 가정 폭력의 상흔은 주인공 그녀의 성씨에 남아있다. 우리네와는 달리, 서구권에서는 결혼하면 보통 신부가 신랑의 성을 갖다 쓰잖나. 그 때문인지, 남편과 좋게 좋게 이별한 것이 아님에도 주인공은 여전히 죽은 남편의 성씨를 쓰고 있다. 그런 걸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던 건지, 아니면 차마 바꾸지 못했던 건지. 또는 간절히 바꾸고 싶었으나 그게 당장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중요한 건 그녀가 그의 성을 쓰고 있다는 것. 

주인공 여성을 제외한 시골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다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 그리고 그 남성들의 얼굴이 모두 똑같다는 것 역시 영화가 품고 있는 젠더 이슈를 더 공고히 만든다. 물론 영화를 관람한 뭇 남성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었겠다.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이 한 명의 여성을 노리고 사방에서 옥죄어 오다니. 이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상정하는 묘사 아닌가? 영화는 충분히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인 알렉스 갈랜드는 인터뷰를 통해, 우리의 가치관과 문화 속에 무의식적으로 남아있을 법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말했다. 그러니까 짐짓 불편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전체를 그냥 호도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말.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심지어는 그 행동들도 유사해서 무슨 하이브 마인드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것 아닌지 의심되는 남자들. 시골뜨기의 모습을 한 남자는 배려없는 성적 농담들을 내뱉고, 신부의 모습을 한 남자는 인류의 역사를 타고 대대로 내려오는 이른바 남존여비 마인드를 조언이랍시고 던져댄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도 되는 듯 보이는 젊은 청소년 모습의 남자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강간 메타포를 제공하고, 경찰의 모습을 한 남자는 여자의 신고를 무시한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로 다른 말들을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말하고자 하는 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똑같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공포의 무력감. 제목을 'Man'이 아닌 'Men'으로 지은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의 극한을 제공하는 게 바로 영화의 결말부. 남자가 남자를 낳는 진풍경. 근데 그게 또 일관된 곳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각자 다른 부위에서 출산시키는 해괴한 모습. 영화의 메시지가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이 부분이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것 역시 이 부분이다. 또한 배우 역시도 가장 고생했을 게 이 부분 아니었을까 싶고. 인터뷰 보니까 해당 역할들을 다 연기한 로리 키니어가 오로지 이 장면만을 위해 일주일 동안 흙밭에서 기어다녔다 하더라. 

고성능 AI를 소재로 했을 뿐, <엑스마키나>는 사실상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상호간의 사랑인 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일방적인 뒷통수였던 건에 대하여. 이어지는 <서던 리치 - 소멸의 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사람의 소리를 흉내내 그것으로 먹잇감을 꾀는 짐승의 등장이었지. 이로서 알렉스 갈랜드는 <엑스마키나>와 <서던 리치>를 통해 '무언가를 얻기 위해 관계를 이용하는 누군가'를 꾸준히 다뤄왔다. 그리고 이번 <멘>에 이르러, 알렉스 갈랜드의 그러한 소재적 취향은 더 빛을 발하고. 한마디로, 알렉스 갈랜드는 인간관계에 대해 참으로 염세적인 비전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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