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5 12:54

그레이 맨 극장전 (신작)


영화가 블렌디드 음료 같다. 이것 저것 익숙한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익숙한 배합으로 섞어 만든 스무디랄까? 이렇게만 말하면 뻔하고 재미없는 나쁜 영화인가보다 싶지만, 그 맛이 익숙해 아는 맛이라 자꾸 마시고 싶어진다는 점 때문에 마냥 그렇게 매도하는 것도 어렵게 느껴진다. 

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엄청 뻔하긴 하다. 범죄자였으나 마지막 기회를 얻어 인간병기로 거듭나는 주인공. 최고의 실력을 가졌지만 그런 그를 잠재적 위협으로 여긴 상부의 음모로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된다는 전개. <본 얼티메이텀>에서도 쓰였던 현직 요원이 전임자 만나 죽이게 되는 장면. 여기에 이젠 질리지도 않나?- 싶어지는 어린 소녀의 존재까지. 보다보면 <007> 시리즈와 <본> 시리즈는 물론이고 감독의 전작이라 할 수 있을 <익스트랙션>까지 떠오르게 된다. 그야말로 궁극의 아는 맛.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안일한 태도로만 돌진하는 영화였다면 보는 입장에서야 혀 끌끌 차고 치워버렸을 터인데, 그럼에도 영화가 곳곳에서 무언가를 해보려한다는 인상을 받아 이상하게 매혹되었다. 현직 요원이 전임자 만나 싸우게 되는 장면이야 앞서 말했던 것처럼 뻔하지. 하지만 이 뻔한 상황 안에서 감독이 뭐라도 해보겠다 노력한 느낌. 폭죽 포대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액션 안무를 짠다거나 하는 등의. 중반부 소녀의 집에서 펼쳐지는 일대일 단독 액션도 그렇다. 정전되어 어두운 공간 안에서 암살자와 주먹다짐을 벌이는 건 역시나 또 뻔하잖아. 그러나 감독이 여기서는 주인공에게 손전등을 쥐어준다. 어두운데 주인공이 물리력을 가할 때마다 빛이 발광해 마구 움직인다. 아, 정말로 악조건 속에서 뭐라도 해보려 노력했구나- 싶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에 제일 매혹된 포인트는 주연인 라이언 고슬링의 표정이었다.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막중한 상황 앞에서 우리의 제임스 본드는 어땠나? 항상 여유만만이었지. 그렇다면 제이슨 본은? 살아남기 위해 이를 꽉 물고 최선을 다했었지. 그리고 그건 <익스트랙션>의 주인공 타일러도 마찬가지였고. 이에 반해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그레이 맨>의 식스는 표정이 어째 다 떨떠름하다. 마치 하기 싫어 죽겠는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로 시종일관 액션에 임한다. 그런데 그게 너무 웃겼다. 극중 상황은 진지하다 못해 위험한데, 주인공의 표정 만큼은 잔업을 위해 주말 출근한 직장인 같은 느낌이어서. 그와중 실력은 또 막강해. 그 몸짓과 표정 사이의 갭이 괜시리 날 킬킬거리게 만들었다. 묶여있던 수갑 부수려고 권총 주워 방아쇠 당겼는데 공이가 빈 약실을 때리기만 할 때의 그 주인공 표정이란...

이게 이제는 욕인지 칭찬인지 잘 구분이 안 가는데, 어찌되었든 여러모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다운 영화였다. 주말밤 맥주 한 잔 마시며 보기 딱 좋은 영화. 캡틴 아메리카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묘를 보여주는 크리스 에반스가 멋지고 아나 드 아르마스는 예쁘며, 빌리 밥 손튼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그럼에도 라이언 고슬링의 표정이 그 맥주의 최고 안주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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