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0 16:23

메모리 극장전 (신작)


리암 니슨이 실력 좋은 킬러 역할이라니! 그리고 그의 복수에 한 소녀가 얽혀있다니! 이 두 문장만 봐도 <메모리>에 대한 인상은 어느 정도 판가름 나기 마련이다. 어쩔 수가 없다. 그걸 관객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책임은 <테이큰> 첫편 이후 공장장처럼 무성의하게 많이도 찍어냈던 리암 니슨표 액션 영화들이 모두 함께 나눠져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모리>는 최근 3~4년간 만들어진 그저 그런 리암 니슨표 중소 규모 액션 영화들과는 조금 구분지어져야만 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엄청 잘 만들었다는게 아니다. 영화의 만듦새는 여전히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뭔가를 해보려 했다는 것이 귀중 하다는 소리다. 


열려라, 스포 천국!


중증 치매 증상으로 이미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노년의 형. 근데 그게 가족력이라도 되었던 건지 뭔지, 주인공 알렉스 역시 스스로에게서 형과 비슷한 치매 증상을 발견한다. 이후 간신히 약에 의존해가며 클라이언트들에게서 받은 살인 청부로 살아가던 알렉스. 이젠 은퇴를 생각할 나이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들 속 상사들이 으레 다 그렇듯 <메모리>의 그들도 알렉스의 은퇴 선언을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치매 걸린 킬러라, 뻔하다면 뻔하지만 그래도 꽤 재밌는 설정이다. 상상해봐라, 임무 수행 중 자꾸 타겟이 누구였는지 까먹는 히트맨이라니. 내가 왜 여기있는지, 방금 이 사람을 내가 죽인 건지 뭔지 오락가락하는 킬러의 이야기. <메모리>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분명한 강점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영화는 이 재밌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할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 알렉스의 치매 설정은 그저 이야기에 잠깐씩 제동을 거는 역할로써만 존재하고, 그마저도 너무 드문드문이라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가끔씩은 관객으로서 주인공이 치매에 걸려있다는 정보를 살짝 잊게 된다. 제목은 '메모리'인데 정작 주인공의 기억에는 별 관심이 없는 영화. 

하지만 '치매 걸린 킬러'란 설정은 장르적 재미에 한해서만 아쉬울 뿐,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를 강화하는데엔 도움을 준다. 제목은 '메모리'인데 정작 주인공의 기억에는 별 관심이 없는 영화라고 했었지? 사실 어쩌면 제목의 '메모리'는 주인공의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극중 등장 하는 핵심 아이템, USB에 들어 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치매 걸린 킬러'란 설정은 영화의 메시지에 기여한다. 

USB에 들어있던 것은 다 큰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있단 사실에 대한 물증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더럽고 추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물증. 그 비참한 현실 앞에서, 은퇴를 꿈꿀만큼 나이를 먹은 노년의 킬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을 자꾸 자꾸 버려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갖고 있는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태도 때문에 또 그 효과가 배가된다. 우연한 만남으로 주인공과 멜로 드라마를 쌓아가려는 건가 싶었던 여성은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테이큰>과 <마크맨>에서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살아남아 주인공에게 세대교체의 희망을 전달할 것 같았던 어린 소녀는 관객들의 그러한 예상을 한참 빗겨가며 죽고. 심지어는, 리암 니슨이 연기한 알렉스 또한 영화의 결말 이전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거 리암 니슨표 액션 영화인데! 리암 니슨이 끝까지 살아남지 못한다고!

영화의 그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비정한 세계에 대한 하드보일드적 태도로 읽힐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이미 악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해봤자 결코 승리할 수는 없을 거라는 태도. 당신이 리암 니슨의 얼굴을 한 불세출의 액션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 악한 세상 안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최종 흑막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을 단죄하는 것은 결국 리암 니슨의 얼굴을 한 액션 영웅이 아닌, 오히려 국경 바깥에서 넘어온 분노에 가득찬 외국인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단한 승리 대신 작고 소중한 희망을 남기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기억이며, 또한 그 기억으로 간신히 전달한 마음이다. 어차피 이기지는 못할 테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수는 있으니 결코 희망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자는 영화의 그 건실한 태도가 왜인지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메모리> 또한 <커뮤터><어니스트 씨프>, <블랙라이트>처럼 전형적이고 재미없는 리암 니슨표 액션 영화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리암 니슨의 굼뜬 동작에 액션은 아쉽고, 그에 비해 카리스마 떨어지는 악역들의 모습 또한 실망스럽거든. 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지언정, 그 안에서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요만큼은 보이는 것 같아 그래도 나아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영화가 품고 있던 메시지의 태도와 일맥상통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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