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9 18:08

불릿 트레인 극장전 (신작)


사필귀정의 과정을, 오월동주하는 인물들로, 운부천부하게 그려내는 영화.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재미의 8할이었다. 


사필귀정, 오월동주, 운부천부, 스포일러!


스턴트맨 출신 영화감독으로서, 지금까지의 데이빗 레이치는 액션에 전면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에스피오나지 특유의 장르적 복잡성을 넘어 쓸데없이 더 복잡해졌던 <아토믹 블론드>, 1절에 2절을 넘어 5절까지 해버리는 유머로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던 <데드풀 2>, 그리고 그 화룡점정으로 이렇다 할 이야기거리가 없어 보였던 <홉스 & 쇼>까지. 데이빗 레이치의 영화들은 누가 액션 영화 전문 감독의 작품들 아니랄까봐 전부 다 이미지와 스펙터클 뿐이었다. 하지만 유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불릿 트레인>은 이 겉만 화려했던 감독에게 든든한 내조를 더해준다. <부산행>처럼 한 열차에 올라탄, 그렇게 싸우고 구르며 엮이는 여러 킬러들의 액션만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불릿 트레인>은 의외로 업보를 통한 운명론적 귀결을 감싸안는 영화다.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는 킬러들 사이 관계보다, 그래서 과연 이 모든 이들을 이 한 열차에 함께 태운 이는 누구?-라는 질문으로 추동되는 의외의 후더닛 미스테리에 더 중점을 둔다. 

모든 것은 다 우연처럼 보인다.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되어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건가 싶은 2인조 쌍둥이 킬러, 결혼식에서 모든 걸 잃고 복수를 위해 저 멀리 아시아의 일본까지 건너온 멕시코 카르텔 소속 범죄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분홍으로 물들인 정체불명의 여고생과 아들을 반쯤 잃고 실성해 열차에 오른 비루한 남자까지. 심지어 영화는 인간들 뿐만 아니라 여러 비인간 캐릭터들에게도 우연을 하사한다. 일본 애니메이션계 인기 캐릭터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마마몬은 열차 안을 부담스럽게 채우고, 며칠전 도난 당했다며 온 뉴스 채널을 도배한 독사 역시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불릿 트레인>은 그 모든 캐릭터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짧게나마 화려한 플래시백과 과시적인 자막들로 담아낸다. 물론, 이는 일정부분 촌스러워 보인다. 불과 10,20여년 전에만 나왔더라도, <불릿 트레인>의 이러한 과시적 스타일은 이른바 '새로운 것'이라며 칭송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타일은 이미 타란티노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후 가이 리치나 매튜 본, 에드가 라이트 등이 그 성화를 이어받아왔다. 그러니까 2022년 기준으로 더는 새로운 스타일이라 할 수 없는 것. 여기에 특유의 산만함은 어쩔 수 없이 당연한 단점이 되고. 

하지만 구구절절한 것처럼 보였던 그 사연들은 이 모든 사건을 계획한 백의 사신이 등장한 이후 하나로 합쳐진다. 자신의 아내를 죽인 데에 아주 조금이라도 일조했다면 그들 모두를 다 벌하리라! 그렇게 백의 사신이 계획한 음모는 시작되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 비극들이 으레 그렇듯, 그 음모가 죽이는 것은 결국 백의 사신 그 자체였다. 죽어야 할 사람은 죽고, 살아야 할 사람은 살게 된다. 복수를 다짐했던 자는 복수를 이룰 것이고, 복수를 오인했던 자는 그 복수에 스스로가 당할 것이니. <불릿 트레인>은 흡사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게 하는 매우 과장된 스타일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자기 실현적 예언 같은 요소 덕분에 스스로를 그리스 비극처럼 보이게 만든다. 참으로 묘하다.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안식년에 들었던 킬러, 레이디 버그가 주인공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가 재수없다 말한다. 죽음은 항상 자신을 찾아온다고. 하지만 그건 반만 맞는 말이었다. 본인이 재수 없기 때문에 행운의 상징인 무당벌레를 코드명으로 삼아준 것이냐 그는 반문하지만, 이에 사나다 히로유키가 연기한 장로는 말한다. 일본에서 무당벌레는 다른 이들의 슬픔을 대신 안고 살아주는 자라고. 생각해보면 맞다. 레이디 버그는 결과론적으로 내내 재수없었지만, 그 재수없음 덕분에 그의 주변 사람들은 아주 잠깐이나마 재수가 있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은 운이 좋다 떠벌리고 다녔던 프린스도, 사실 생각해보면 그 운의 태반을 모두 레이디 버그가 만들어준 셈이었지 않은가. 물론 레이디 버그가 거기까지 큰 그림을 그렸을리는 만무하지만. 

조금의 불운을 얻고, 그걸 통해 큰 행운을 이룩한다는 부분도 재미있는 설정. 영화 초반, 레이디 버그는 차에 치일 뻔하지만 작은 물웅덩이에 그 신발이 젖은 탓에 위기를 모면한다. 또, 호넷에게 투여 당한 독에 해독제까지 맞아뒀기 때문에 그는 이후 독사와 다시 조우했을 때 그에 미친듯이 물리고도 살아남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물리고 물리는 업보. 거기에 또 추가되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 사이 편 가르기. <불릿 트레인>은 액션 블록버스터로 홍보된 영화임에도 액션의 규모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 관객들을 현혹시킨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거기에 넘어갔고. 

뜬금 없지만, 잭 스나이더의 영화들을 보며 나는 언제나 말해왔다. 이 비주얼리스트 감독에게는 그저 좋은 각본이 필요할 뿐이라고.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을 데이빗 레이치의 영화에게서 봤다. 항상 액션 스펙터클로만 박박 우기던 감독이 흥미롭고 밀도 높은 각본을 만났을 때 나올 수 있는 의외의 활력. 브래드 피트 얼굴을 한 레이디 버그의 끝내주게 피곤한 하루동안의 기차 여행. 레이디 버그가 함께 하자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언제든 그 기차 표를 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뱀발 - 카메오를 엄청 잘 쓴 영화라고 본다. 설명할 시간 없을 땐 영화 외적 이미지가 강력한 스타 배우들 쓰는 것도 나름의 용병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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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불릿 트레인&gt;</a> (데이빗 레이치) 사실 영화가 조금 산만하고 정신 없긴 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작 치고는 너무 베베 꼬아놓은 것도 어떤 이들에겐 큰 단점이겠다. 하지만 &lt;불릿 트레인&gt;이 운명을 다루는 방식은 정확히 내게 꽂혀들었다. 운부천부. 사필귀정. 여기에 업보라는 개념까지 끌고 온 듯한 영화의 뻔뻔한 태도에 무척이나 신이 났다. 끝까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단 점에서, 거짓말 조금 보태 쿠엔틴 ... more

덧글

  • rumic71 2022/08/30 09:55 # 답글

    흑백 쌍둥이는 실제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모친이 많이 문란했죠.
  • 잠본이 2022/09/06 15:37 #

    미녀삼총사 2에서 보슬리의 동생이 다른 인종이었던 것도 사실은 근거있는...?! (상관없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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