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3 16:29

썬다운 극장전 (신작)


영화가 끝난 직후, 극장 상영관의 조명이 켜질 때 생각했다. '뭐 이딴 영화가 다 있어?' 그렇게 조금의 실망감을 간직한 상태로, 나는 <썬다운>의 주인공 닐처럼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극장에서 집까지 가는 그 도보 20분 길. 그 길을 걷는 동안 <썬다운>에 대한 내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난 직후엔 감히 이해되지 않던 닐의 삶이, 집의 현관문을 열 때쯤엔 이해되었다. 그게 비록 영화 속 가상 인물의 삶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이해하려 하는데에 20분은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영화의 마법 같았다. 조금씩 걸으며 진군 했던 그 20분동안, 누군가가 가졌던 극단적 삶의 태도를 이해해보게 되는 경험. <썬다운>의 결말은 내게 마법 같았다. 


썬포일러!


닐은 여동생 앨리스의 가족들과 함께 멕시코의 고급 휴양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낸다. 그러던 와중 걸려온 전화는 남매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고, 이에 충격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앨리스는 급히 짐을 챙겨 런던으로 돌아가려 한다. 닐 역시 그녀와 함께 공항에 가는데 이게 웬일, 호텔 리조트에 여권을 두고 온 것. 상황이 급박한 만큼 닐은 앨리스와 그녀의 가족들 먼저 비행기에 태운다. 호텔 가서 여권을 찾고 바로 다음 비행기로 따라가겠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앨리스가 비행기에 오른 뒤에도 닐은 지내던 호텔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여권은 언제나 그랬듯 그의 가방 안에 있었고, 그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남몰래 즐기는 휴가에 빠진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열리든 말든, 동생 앨리스에게서 전화가 오든 말든 그는 달관한 듯한 표정과 태도로 하릴없이 멕시코의 바다를 즐긴다. 

이 기초 설정은 영화 전체를 이끌고 갈 강한 동력원으로써 미스테리를 남긴다. 도대체 닐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동생과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어머니의 장례식을 거를 정도로 멕시코의 전경에 푹 빠진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대체 왜? 생전 어머니와의 사이가 나빴나? 아님 멕시코에 숨겨둔 애인과 자식이라도 있는 것인가? 갑자기 비행기에 타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생긴 것인가? 왜? 도대체 왜 닐은 혼자 여유에 빠진 건데?

영화는 그에 대한 대답을 후반부 가서야 나지막히 읊어준다. 알고보니 닐은 동생 앨리스와 함께 목축업계 재벌가의 후계자였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더 알고보니, 닐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른바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것. 앞서 말했듯, 나는 영화 전체를 지탱하고 있던 그 미스테리에 대한 대답으로 이같은 것이 제시되어 적잖이 실망했었다. 겨우? 나는 또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줄 알았지. 영화 중반에 감옥도 다녀오고, 짧지만 총격전도 있고 해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는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지. 근데 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였다고? 물론 개인의 삶으로 보면 충분히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신선한 영화적 설정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게 뭐? 죽기 전에 신변정리나 하지 그거 귀찮아서 멕시코에 홀로 남았다고?

그런데 바로 거기서 생각이 달라졌다. 죽기 전에 신변정리나 하지-라는 생각. 만약 죽음을 앞뒀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신변정리가 먼저일 것이다. 가족과 친구 등, 주위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는 일. 빌렸던 돈이나 부담하고 있던 요금을 정리하고 인수인계 하는 일. 아끼던 물건을 전달하고 간직하고 있던 비법과 비밀들을 전수하는 일. 아마 그런 것들을 하게 되겠지. 헌데 닐은 왜 그걸 안 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그가 재벌가의 후손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물며 보통의 우리네 삶도 이렇게 정리할 것이 많을진대,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인맥을 갖고 있는 재벌가의 삶은 어떨 것인가. 솔직히 우리도, 가족이나 친척들 중 누군가가 생을 달리했을 때 장례식 포함해 이것저것 챙긴다고 힘들어하잖아. 닐은 분명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닐은 그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헛된 인사치레들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그리고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과, 또 그보다 더 갑작스러웠던 여동생의 죽음 역시 자신 또한 죽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기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나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래로, 아마 닐은 죽음과 관련해 이미 초연해진 달관의 상태였을 테니까. 

뒤가 없는 사람의 남은 생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집으로 오는 20분동안 천천히 생각해봤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서워진다고들 한다. 허나 그 반대의 태도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잃을 게 없어서, 이제는 그냥 모든 것에 달관 해버린 삶. 방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거야 사회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런 거고. 그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배당받아 버린 한 개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건 방종보단 달관한 삶의 태도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덧글

  • 잠본이 2022/09/05 09:58 # 답글

    미스터리인줄 알았더니 사실은 힐링이었던(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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