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이 영화의 개봉년도를 1955년으로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2년 정도의 차이로 헷갈린 건데 뭐 어떤가 싶지만, 1954년에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가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그게 생각보다 좀 중요해진다. 방사능 먹고 깨어난 파충류 형태의 고대 괴수가 인간 세상에 깽판치러 바다를 건넌다는 이야기를 두고 원조 맛집이 어디인지 구분하려면 일단 연도 구분이 좀 되어야겠지.
왜냐면 정말로 놀랍도록 <고지라>와 주요 스토리라인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남극 지하에서 동면 중이던 리도사우루스. 그러나 인간들의 핵무기 실험으로 인해 깨어나게 되고, 그 길로 인간 세상 변두리 어물쩡대다 곧바로 대도시 침공 및 파괴. 인간측 주인공들 중 군인과 과학자 등이 섞여있다는 점도 눈에 띄게 비슷한 점. 괴수를 구현하는 데에 있어 이쪽은 스톱모션을 썼고 저쪽은 수트 액션으로 나아갔다는 점 정도는 차이점이라 볼 수 있을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고지라>가 <심해에서 온 괴물>의 아류 기획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비슷한 설정을 가진 두 편의 괴수 영화가 1년 주기로 동서양 곳곳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물론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따라했다는 것보다는, 그만큼 그 당시 사회가 방사능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었다 보는 게 어찌보면 좀 더 합당한 관점이겠지.
1953년과 1954년. 인류 최초의 핵무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것이 1945년 8월의 일이었으니, 그에 대한 여진으로써 영화가 만들어진 게 불과 8~9년만의 기간이었다. 채 10년도 되지 않아 인류는 스스로가 만든 재앙에 짓눌려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결국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로그라인이 너무도 SF스럽고 너무도 괴수 장르스러워 그 클래식함에 새삼 또 감탄하게 된다.
뱀발 - 레이 해리하우젠의 빛나는 스톱모션은 이후 <아르고 황금 대탐험>에서 절정이었다고 본다.
덧글
젠카 2022/09/28 16:27 # 답글
rumic71 2022/09/30 01:52 #
잠본이 2022/09/29 08:53 # 답글
이친구는 그야말로 깔끔하게 딱 떨어지고 여운도 남기지 않는 잘빠진 SF블록버스터(당시기준)인데 비해
고지라는 신화적 정치적 신파적 군더더기가 착착 감겨들어 질척질척한 느낌을 주는 호러 멜로에 가깝죠.
(사실 에머리히판 갓질러는 고지라보다는 이 영화 리메이크에 가까움)
핵을 쏜 나라와 처맞은 나라의 시점 차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