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8 15:18

심해에서 온 괴물, 1953 대여점 (구작)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이 영화의 개봉년도를 1955년으로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2년 정도의 차이로 헷갈린 건데 뭐 어떤가 싶지만, 1954년에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가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그게 생각보다 좀 중요해진다. 방사능 먹고 깨어난 파충류 형태의 고대 괴수가 인간 세상에 깽판치러 바다를 건넌다는 이야기를 두고 원조 맛집이 어디인지 구분하려면 일단 연도 구분이 좀 되어야겠지. 

왜냐면 정말로 놀랍도록 <고지라>와 주요 스토리라인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남극 지하에서 동면 중이던 리도사우루스. 그러나 인간들의 핵무기 실험으로 인해 깨어나게 되고, 그 길로 인간 세상 변두리 어물쩡대다 곧바로 대도시 침공 및 파괴. 인간측 주인공들 중 군인과 과학자 등이 섞여있다는 점도 눈에 띄게 비슷한 점. 괴수를 구현하는 데에 있어 이쪽은 스톱모션을 썼고 저쪽은 수트 액션으로 나아갔다는 점 정도는 차이점이라 볼 수 있을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고지라>가 <심해에서 온 괴물>의 아류 기획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비슷한 설정을 가진 두 편의 괴수 영화가 1년 주기로 동서양 곳곳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물론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따라했다는 것보다는, 그만큼 그 당시 사회가 방사능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었다 보는 게 어찌보면 좀 더 합당한 관점이겠지. 

1953년과 1954년. 인류 최초의 핵무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것이 1945년 8월의 일이었으니, 그에 대한 여진으로써 영화가 만들어진 게 불과 8~9년만의 기간이었다. 채 10년도 되지 않아 인류는 스스로가 만든 재앙에 짓눌려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결국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로그라인이 너무도 SF스럽고 너무도 괴수 장르스러워 그 클래식함에 새삼 또 감탄하게 된다. 


뱀발 - 레이 해리하우젠의 빛나는 스톱모션은 이후 <아르고 황금 대탐험>에서 절정이었다고 본다. 

핑백

  • DID U MISS ME ? : 방사능 X, 1954 2022-10-01 16:57:16 #

    ... &lt;심해에서 온 괴물&gt;과 &lt;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gt;는 1950년대 초 만들어진 장르 영화의 기틀로써 꽤 단순한 설정과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욕심 ... more

  • DID U MISS ME ? : 지구 vs 비행접시, 1956 2022-10-01 17:10:39 #

    ... &lt;심해에서 온 괴물&gt;과 &lt;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gt;, &lt;방사능 X&gt;가 크리쳐 영화의 고전으로써 현대 영화에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라면, &lt;지 ... more

덧글

  • 젠카 2022/09/28 16:27 # 답글

    제가 어제 우연히 1942년에 나온 슈퍼맨 애니메이션을 봤는데요, 여기서도 파충류 형태의 괴수가 도시를 습격하는 아주 전형적인 패턴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영어를 다 못알아들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빙하기에 냉동된 공룡을 운반하다 잘못해서 다 녹고 밖으로 나온 상황 같긴 합니다만, 다리를 부수고 도심 건물을 부수고 사람들은 도망가고 군인들이 총을 쏘고 대포를 쏴도 끄덕안하는 상황이 너무 전형적인 괴수물이라 깜짝놀랐네요. 1942년작인 걸 감안하면 비슷한 상상력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더군요. 그 전에 킹콩도 있었고요. 아래 링크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NH3lLEQoY0
  • rumic71 2022/09/30 01:52 #

    킹콩 이전에 로스트월드에서도 원작에 없는 도시 장면이 들어있었죠. 이런 방향으로도 한 번 파고들어보면 재미있는 결과 나올듯.
  • 잠본이 2022/09/29 08:53 # 답글

    같은 재료를 갖고 미묘하게 다른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와 고지라를 비교할때 중요 포인트인데
    이친구는 그야말로 깔끔하게 딱 떨어지고 여운도 남기지 않는 잘빠진 SF블록버스터(당시기준)인데 비해
    고지라는 신화적 정치적 신파적 군더더기가 착착 감겨들어 질척질척한 느낌을 주는 호러 멜로에 가깝죠.
    (사실 에머리히판 갓질러는 고지라보다는 이 영화 리메이크에 가까움)
    핵을 쏜 나라와 처맞은 나라의 시점 차이랄까(...)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