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7 16:03

앵무새 죽이기, 1962 대여점 (구작)


한국 전쟁이 끝난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던 해, 저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앵무새 죽이기>가 개봉되었다. 동명의 원작 소설로 치면 그 출판이 1960년이니, 10년이 뭐야 전쟁 7년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인 거지. 우리가 우리와 닮은 얼굴을 한 이웃들과 전쟁을 벌이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온몸으로 불사르고 체감할 때에, 미국에선 그들 안의 이웃을 돕고 보듬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인류애의 꽃을 피워냈다. 허나 역사는 돌고 돈다고, 현재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과 범죄를 떠올려보면 그 미국 또한 마냥 선진국이라 부르기 민망하고 영 낭패스러운 게 현실. 

정의로운 변호사 주인공이 등장하고 영화의 후반부 모든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는 법정 장면이 존재함에도 끝내는 그 주인공 측이 패배한다는 잔혹한 현실이 너무 탈영화적이라 불편하다. 심지어 억울하게 몰린 그 피고인은 결국 모든 희망을 잃고 직접 생을 마감하기까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아직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회적 인식 때문에 패배하고 실패하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나 연이어 그의 곁에 남아있는 어린 아이들, 그러니까 다음 세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는 조금씩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나아지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라서 조금 더 애틋하다. 

그레고리 펙은 여러 역할들을 연기해왔지만, 유독 이 영화에서의 이미지가 뭔가 그의 기존 이미지에 정통성을 더해낸 것 같아 특별하게 느껴진다. 영화 자체가 그야말로 정통 그레고리 펙 같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그의 매력이 십분 발휘된 장면은 후반부 법정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전반부에 위치한 그네에서 벌어지는 딸과의 대화 장면이라고 본다. 그레고리 펙 특유의 올곧은 매력이 잘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그의 말이 '이야기' 자체의 본질 같게 느껴지기도 해서 좋음. 

덧글

  • rumic71 2022/10/08 02:39 # 답글

    어차피 미국은 6.25 5년 전까지 닮은 얼굴 상대로 죽자고 싸웠죠. 안닮은 얼굴과도 싸웠지만.
  • 잠본이 2022/10/11 10:06 # 답글

    90년대에 슈퍼맨이 코믹스에서 한번 죽었다 부활하는 에피소드에서 로이스가 미심쩍어하자
    슈퍼맨이 이거 제목을 말하고 로이스가 '클락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제목이잖아?'라고 생각하여
    그를 믿기 시작하는 장면이 있는데 꽤 상징적이더군요. 지금도 유효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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