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2 18:38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극장전 (신작)


가족 이야기이며, 또한 삶의 경험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종국에는 그 가족과 그 경험을 결부시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자신에 가득 차 웅변하는 영화로써 귀결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곳을 갈 수 있다해도, 그리고 심지어는 그 모든게 한 번에 덮쳐온다 해도. 나는 네 옆에 있고 싶고 또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영화. 거대한 우주들을 넘나들고 또 유영하며 소박한 바람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거대하면서 소박한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사실 영화는 전형적인 구도로 진행된다. 구원자 모티프, 이른바 초즌 원이 강림해 우리 모두를 구할 거야-라는 컨셉.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고, <터미네이터>의 존 코너가 그랬으며, <해리 포터>의 해리 포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선택받은 누군가가 나타나 부조리한 세상을 전복시키고 희망을 줄 거라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쪽 우주의 에블린은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짐짓 평범하게 보이지만 결국엔 천지가 요동치는 각성 끝에 모든 우주를 구해낸다. 선택받은 존재, 특별한 존재로서. 그런데 이는 그저 잘못된 인과관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은 선택받았기에 구해낸 것이 아니라 끝내 구해냈기에 선택받은 것처럼 그녀가 여겨지는 것이다. 알파버스에서 찾아온 웨이먼드도 처음에는 말하지 않나, "이 에블린이 아니었나봐."

따지고 보면 모든 우주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에블린은 알파버스의 에블린이었다. 그녀는 멀티버스의 존재를 깨우치고 삼라만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우주를 연결시켜 소통 되게끔 만들었으며, 온우주가 그녀의 이름을 새기게 만들었다. 고로 어쩌면 초즌 원은 알파버스의 알파 에블린이었을지도 모른다. 헌데 왜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 우주의 에블린인가. 왜 우리 우주의 보잘 것 없는 에블린이 온우주를 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빈 잔은 더 채워담을 여지가 있지만, 이미 꽉 차버린 잔은 더 채워봤자 흘러내릴 뿐이다. 우리 우주의 에블린은 빈 잔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헤쳐온 자신의 모든 삶을 거꾸로 돌려 역산해봐도, 어째 모조리 다 최악뿐이었던 것만 같은 인생. 하지만 결과론적으론 그 모든 실수와 실패와 좌절과 슬픔이 지금의 에블린, 그리고 그녀의 삶을 만든 것. 가족과의 관계는 좋지 않고, 평소 특별히 배워둔 건 없고, 몸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닐 뿐더러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만족 못하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그녀는 오히려 우주를 구할 수 있었다. 더 채울 수 있는 빈 잔이었기에 그녀는 이쪽 이웃 우주에서는 쿵푸를, 저쪽 이웃 우주에서는 노래 실력을 빌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 영화의 분위기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그리고 그 원작이 되는 동명의 책과 비슷하게 여겨진다. 이미 모든 걸 다 깨우쳐버렸기에 남은 인생의 목적과 낙을 잃어버린 상태. 코스모스 뒤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미리 알게 되버려 카오스를 추구하게 되어버린 자의 공허한 악행. 알파버스의 알파 에블린이 지나치게 몰아세운 탓에 모든 우주의 모든 가능성과 경험들을 일찍 깨달아버려 오히려 소멸을 꿈꾸게 된 조이, 그러니까 조부 투파키는 하찮아 보이는 베이글을 블랙홀처럼 만들어 모든 스스로의 삶을 끝내고자 한다. 호된 싸움 끝에 겨우겨우 설득한 엄마와 함께 소멸의 길에 들어서려던 찰나, 모든 우주의 웨이먼드에게 '친절함'이라는 무기를 전수받은 이쪽 에블린의 각성으로 조부 투파키는 패배하게 된다. 그런데 그 패배를 결정지은 말이 무려 "나는 지금 너의 곁에 있고 싶어"라니. 

여기서 나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속 구절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멀티버스, 평행우주를 다루지만 칼 세이건은 적어도 우리네 진짜 우주를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칼 세이건을 비롯한 천문학자들도 이 영화 속 조부 투파키와 비슷한 일들을 겪곤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주가 너무나도 광대하고 무한해 그 안의 인간이란 우리 존재가 먼지 또는 티끌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목격 했을 때, 천문학자들은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게 딱 조부 투파키의 상황이잖아. 헌데 칼 세이건은 말한다. 그 역시 천문학자로서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느꼈을 텐데도, 그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함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서 찍힌 이 (우주 속 지구의) 이미지만큼 인간의 자만이 어리석다는 걸 잘 보여주는 건 없을 겁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창백한 푸른 점을 소중히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 세이건과 웨이먼트 말마따나, 친절함은 최고의 무기다. 그리고 그 무기는 선제 공격용으로 쓰일 때 특히 더 강력해진다. 이 엄청난 가능성의 우주 속 한 지점과, 이 억겁처럼 긴 시간 속 바로 지금 이 시점 모두를 가까스로 공유하고 있는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해질 것.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렇게 친절한 태도로 온우주와 내 옆의 한 사람을 결국 구해낸다. 

이 영화에 대한 마지막 인사는 칼 세이건의 말을 한 번 더 빌려바꿔하는 것으로 하면 완벽할 것 같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당신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겐 하나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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