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9 21:05

고속도로 가족 극장전 (신작)


고속도로를 따라 휴게소를 전전하며 낮에는 동정심을 팔아 사실상의 구걸을 하고, 밤에는 아무렇게나 설치한 텐트 안에서 잠을 청하는 가족이 있다. 대책없을 만큼 매사 긍정적인 아빠와 셋째를 임신 중인 엄마, 여기에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장녀, 그리고 그 무엇이든 얻을 수만 있다면 바로 눈물 수도꼭지를 틀어버리는 막내 아들까지. 국토 대장정 하듯 고속도로를 따라 인생 대장정을 펼치던 네 가족은, 최근 아들을 잃은 또다른 여성과 7만 원짜리 첫인사를 나눈다. 그렇게 시작된 악연,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인연의 이야기. 

고속도로 가족은 위태로워 보인다. 당연하다. 진작 학교에 가 의무 교육을 받았어야 했던 두 아이들은 각자의 이름조차 한글로 쓰지 못하는 채로 덤프 트럭들이 오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주차장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유년기를 보내고 있고, 여기에 임산부인 엄마마저 화장실 변기에 쪼그려앉아 쪽잠을 자고 있는 형국이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구제불능인 건 아빠이자 남편인 기우다. 그가 구제불능인 이유는 차고 넘친다. 두 자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안정적인 미래보다 불안하고 위험한 현재만을 택하고 있는 것, 타인의 호의를 이용해 그들을 등쳐먹는 것 등. 하지만 영화는 그에 대해 나름의 변명을 하고 있고, 나 역시도 그를 아주 이해 못하겠는 건 또 아니었다. 그래, 몸과 마음이 아픈데 거기다 젊은 날 사기까지 당해 인생 나락을 맛보았으니 저러는 것도 일견 이해는 간다구. 그런데 나는 그가 경찰서에서 탈출해 동네 분식 포장마차 아줌마에게 먹다 남은 어묵 꼬치로 협박하는 모습을 보곤 그나마 갖고 있던 정과 이해심마저 모조리 다 탈탈 털려버렸다. 뭐야, 이 새끼는 그냥 아주 안 될 새끼잖아? 사람들의 호의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기회만 된다면 꼬챙이라도 꽂겠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기우가 이러하니, 라미란의 영선을 만나 모처럼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나머지 가족들의 삶이 더 애틋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저 불안한 행복.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든 최소한 조금은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저 행복의 모습. 그래서였을까,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임에도 유독 영선에게 시간이 가 꽂혔다. 그리고 최근 코미디 영화 위주로 출연하며 이미지에 있어 고착 아닌 고착을 이어가던 라미란의 연기력 역시 빛나더라. 별 거 아니지만 영선이 어린 소녀의 머리를 땋아주며 울먹이는 장면에선 나도 괜시리 울먹거리게 되었다. 

세상에 일방적인 구원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도, 사실은 그 도움을 행하며 스스로에 있어 구원을 얻는다. 이 영화에선 영선이 그랬다. 그녀는 고속도로 가족을 돌보는 것으로 구원을 행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그들 덕에 스스로도 구원에 조금은 가까워졌다. 비탈길을 걸어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서로에 대한 구원은 양방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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