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관 저쪽 끝자락의 이집트에선 세상의 운명이 걸려 한없이 무겁기만 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판국인데, 또 이쪽 미국의 LA에서는 이토록 한없이 가벼운 이야기가. 하지만 언제나 말했듯 장르의 다양화를 선도하고 있는 MCU 세계관이니 이 정도의 시트콤이 하나 나왔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반갑다. 데미지 컨트롤을 소재로 시트콤 만들거라더니만 질질 끌기만 하다, 그래도 결국 이렇게 하나 완성해내긴 해내는 구나.
그러니까, 이 시트콤 포맷과 분위기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 MCU 세계관을 배경으로 이런 거 한 번쯤은 보고 싶었고, 또 주인공이 법조인이다 보니 세계관에 등장한 여러 메타휴먼들을 소재로 생활감 있게 그 시트콤을 꾸렸다는 것 역시 의의 있다. 시리즈를 모두 정주행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이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를 싫어하는 입장이던데, 나는 그게 좋았음. 그래서였을까, 다들 가장 재밌게 여기던 첫번째 에피소드가 나는 제일 별로더라. 브루스 배너가 찬조 출연하는 그 미끼용 첫 에피소드 말이다. 뭐랄까 너무 핑계용 에피소드 같았던 거지. 쉬헐크는 이렇게 헐크가 됐고요~ 아, 그리고 여러분 수퍼히어로가 수퍼히어로랑 싸우는 거 좋아하시죠? 헐크 vs 쉬헐크 한 번 넣어 드립니다~-라는 느낌의 그 스탠스가 너무 숙제 같아서 싫었다.
때문에 브루스 배너가 빠지고 난 뒤부터가 오히려 재밌더라. 주인공인 제니퍼는 적당히 매력있는 인물이고, 여기에 쉬헐크로서의 모습 또한 멋지다. 매 에피소드마다 그녀가 해결하는 사건들 역시 캐주얼하게 즐길만 했고, 무엇보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다시 만난 맷 머독의 액션 장면들은 하나 같이 다 애정할 수 밖에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음. 그러니까 그냥 이 정도의 기조만 쭉 유지해줬어도 괜찮았을 터인데...
문제는 그냥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는 데에 또 있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가벼운 건 괜찮아. 근데 그 안의 인물들까지도 실없이 그래버리면 어떡하냐. 오리지널 캐릭터들 부터가 그렇다. 존나 이제 이 세계에서 초능력을 얻는 건 가벼운 접촉사고 정도 밖에 안 되나 보다. 딸이 수퍼히어로로 각성한 이후 함께하는 첫 가족 식사 자리인데 초능력 생긴 경위나 부작용 이런 건 걱정 하나도 하지 않는 가족. 이걸 쿨하다고 해야할지... 아무리 오리지널 헐크가 나온 집안이라 해도 그렇지 말이다. 아니, 이렇게 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브루스가 겪었던 존재론적 자기혐오는 대체 뭐가 되는 건데?
<인크레더블 헐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보미네이션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나. 팀 로스 씩이나 다시 데려와놓고 그냥 냅다 평화주의자로만 쓴다고? 힘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뉴욕 할렘을 초토화 시키고 브루스를 거의 반쯤 죽일 뻔했던 그 양반이 이제와 요가와 명상으로 단련된 히피가 됐다는데 이걸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청자 입장에선 그냥 어이가 털릴 뿐. 또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 이어 다시 등장한 웡. 웡이 개그 캐릭터가 되는 건 문제 없다. 원래도 개그 한 스푼 담당이었지않은가. 그런데 소서러 수프림 역할로서 망가지는 건 문제 있지. <닥터 스트레인지> 1편에서는 비욘세 노래를 즐길지라도 적당히 엄근진한 마법 도서관의 사서였는데 이제는 그냥 소파에 누워 밀린 드라마 보는 게 유일한 낙인 미드폐인 됐음. 이 정도 무게감이라면 호그와트에서도 안 받아줄 듯.
이 방면에서 제일 손해를 본 건 역시나 데어데블이겠지. 물론 앞서 말했듯 그에게 멋진 순간들이 부여 되기는 한다. 한 두 세 번 정도...? 그러나 그 외에는 몽땅 잘못된 이미지 변신. 지난 세 시즌의 이미지를 오마주하려 복도에서 깡패들과 조우하는 장면. 당연히 팬으로서 기대했지. 하지만 갑자기 쉬헐크가 난입해 냅다 정리 해버린다. 다만 아쉽더라도 이건 이해함. 어쨌거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데어데블이 아닌 쉬헐크니까. 그러나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이후 원나잇 보내는 건? 데이트하는 건? 맷 머독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이미지는 다 어떻게 된 거냐? 게다가 수트 입고 벌건 대낮에 그냥 동네 돌아다님. 이 새끼 지난 세 시즌의 맷 머독 맞죠? 스크럴이 변장한 거 아닌 거죠?
그리고 여기에 화룡점정이 되는 마지막 에피소드의 클라이막스 해결 방식. 한 시즌 내내 데드풀 마냥 제 4의 벽을 깨며 시청자들과 소통해왔던 쉬헐크.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갑자기 그녀는 화면 밖으로 이탈 해버린다. 디즈니 플러스의 메인 화면으로 넘어오더니, 끝내는 MCU를 총괄하는 케빈 파이기까지 만나 모든 스토리라인들을 정리해달라 요구하는 그녀. 제 4의 벽을 깨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애초 원작에서 부터 그런 캐릭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알고보면 이 모든 것들이 다 그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의 일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세계관 내에서 있었던 모든 위기들과 비극들은 그저 한낱 대중문화 속 이야기와 설정들일 뿐이었다는 걸 드러내게 되는 거잖아. 엉엉~ 토니 죽어서 슬퍼~, 네~ 걱정 마세요. 실은 진짜로 죽은 게 아니라 담당 배우 몸값이 너무 높고 오래해서 하차 시킨 거거든요~ 씨바 이건 기만 아니냐? 이걸 드러내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인 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 데드풀조차 알고 있었는데 정작 제작진들은 몰랐나보네.
캡틴 아메리카가 동정이었는지 아니었는지로 농담 따먹기하는 거 그냥 그러려니했다. 별다른 설명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헐크의 아들? 씨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이딴 식으로 나름 쌓아왔던 갈등들을 일거에 풀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모두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게 만든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스러운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되면 토니의 죽음과 캡틴의 은퇴를 보며 엉엉 울었던 팬들이 좀 머쓱 해지지 않냐? 그거 두고 혹여라도 이거 다 영화일 뿐인데 뭘 또 그렇게까지 울었어-라 답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오만한 거고.
덧글
ㅌㅁ 2022/11/29 12:21 # 삭제 답글
CINEKOON 2022/12/22 09:50 #
잠본이 2022/11/30 08:54 # 답글
CINEKOON 2022/12/22 09: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