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8 16:57

본즈 앤 올 극장전 (신작)


소녀가 친구의 손가락을 깨문다. 아니, 깨무는 수준이 아니고 아예 물어 뜯어 맛본다. 아-, 이것은 인육의 맛을 깨달아버린 식인 소녀의 비극이구나. 금지된 것을 탐하게 된 자의 비극이로구나.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조금 방향을 튼다. 인간 고기의 맛을 알아버린 소녀의 욕망에서 끝나지 않고, 영화는 그것을 조금 더 확장시켜 그녀를 70년대 미국에서 살아갔던 뱀파이어로 바꿔 만든다. 비록 햇빛 아래에서 산화하는 전설의 존재들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비밀과 욕망을 가진 인간외의 종족. 피에서 피로 전해지고 유지되는 그들만의 세계. 그렇게 영화는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자의 이야기에서,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뻔한 자가 동족을 만나며 사랑이란 구원을 느끼는 이야기로 차츰 변모해 간다. 

식인이라는 자극적 소재를 택했을 뿐, 영화는 성장 영화로 보이고 또 퀴어 영화로도 보인다. 극중 '식인'이라는 텍스트를 그저 '같은 성향' 또는 '같은 가치관', '같은 취향' 정도로 바꾼다면 그건 그거대로 성장 영화가 되겠지. 모든 것이 다 크게 느껴지고 또 위중하게 여겨지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엔 유독 스스로를 더 고독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나. 세상이 모두 등 돌린 것처럼 여겨지는, 그러나 굳이 따지고 보면 그 세상에게서 등 돌린 건 정작 자기 자신이었던 시기에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를 이 세상의 전부로 치환해 생각하게 되니까. 그 부분에서 <본즈 앤 올>은 격동하는 낭랑 18세 소녀의 성장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 퀴어 영화로써 보는 건 더 쉽겠지. '식인' 코드를 '성 정체성'으로만 수정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들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 또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을 그들만의 규칙까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같은 테마를 이미 다뤄봤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본즈 앤 올>을 식인 퀴어 영화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매런은 어둔 밤 길거리에서 자신을 먼저 알아본 설리에게서 '이터'로 살아가며 느낄 피로와 고통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그 본능은 설리를 따라 자꾸만 매런을 쫓아온다. 이미 이후 리와 함께 엄마를 만난 매런이 이터로서 살아가길 포기 했는데도 말이다. 마치 뱀파이어가 그런 것처럼, 이터는 이터를 낳으며 유지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그 피로와 고통의 삶은 매런을 따라오는 것이다. 물론 그걸 환희와 쾌락의 삶으로 여기는 누군가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종국에 매런은 그런 그의 자연적 속성을 떼어버리려 하니까. 그러나 가족이 어찌 그리 쉽게 떼어지는 존재겠는가. 우린 가족을,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 않은가. 매런도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 것이다. 숨기고 참을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내면에서 사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끝까지 따라와 매런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끌어내리려 하는 설리와 본능은, 다행히도 리와 사랑으로 인해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본능은 떼어버릴 수 없는 것. 마치 설리에게서 그새 전염되기라도 한 것인양, 매런은 리의 간절한 부탁을 더해 그의 죽어가는 육체를 잡아물어 뜯기에 이른다. 먹고 하나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하는 영화. 서로에게 밖에 갈데 없으매, 갈데까지 가보자 말하는 두 남녀의 선혈이 낭자한 고백. <본즈 앤 올>은 일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루카 구아다니노의 다른 영화들이 그랬듯 극장 상영관을 나선 관객들의 머릿속을 꽤 오랫동안 부유해 다닐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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