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인 <나이브스 아웃>과 적절히 다르면서도, 또 적절하게 비슷하다. 우선 다른 점. 당연히 영화 속 공간적 배경과 그 계절감. 전편은 벽난로 옆 직물로 짜인 카펫 위에 앉아 듣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었지. 반대로 <어니언 글래스>는 청량한 여름의 계절감을 뽐내며 푸르고 화사한 분위기를 내보인다. 셜록 홈즈 같은 명탐정 캐릭터를 가운데에 두고 그 주변은 매편마다 새롭게 판을 짜는 구성의 프랜차이즈 영화란 점에서 이는 분명한 강점이다. 3편이나 4편까지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좀 더 다양한 배경과 분위기를 시도해볼 수 있겠지. 그리고 다음, 이번 <어니언 글래스>가 전편 <나이브스 아웃>과 비슷한 점. 그것은 다른 것들에서 보다 플롯 안에서의 승부에 더 집착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나이브스 아웃>과 <어니언 글래스> 이 두 편은,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언제 숨기고 또 언제 드러낼지 만으로 미스테리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시켜냈다. 그야말로 플롯의 승리다.
스포일러 어니언!
점진적으로 이 플롯을 쌓고, 꼬고, 또 드러내는 방식이 엄청나게 효과적이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을 통해 한 괴짜 CEO가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퍼즐 상자를 연속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산드라의 퍼즐 상자 파괴까지.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평범한 삶에 지루함을 느끼며 그저 반신욕으로 일상을 낭비하고 있던 블랑에게, 누군가가 상자 하나를 보냈다 말하는 목소리. 영화는 그것만으로 관객들을 단단히 오해시킨다. 보여주는 타이밍과, 보여주지 않고 들려만 주는 타이밍. 이야기의 가장 원초적인 재료, 바로 이 플롯만으로도 영화는 미스테리 장르물로써 승점 하나를 따고 들어간다.
재밌는 건 이것이 비단 이야기의 기능적 요소에만 그치지 않는단 것이다. 거기에는 감정적 요소 역시 더해진다. 카산드라의 죽음이 처음으로 묘사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흐르는 블랑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만난지 채 하루도 안 된 사람인데 놀라면 놀랐지 죽었다고 울 것까지 있나? 하지만 이어지는 과거의 이야기, 그러니까 카산드라 말고 헬렌이었던 여자와 블랑의 관계가 묘사 되며 관객들은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서야 블랑의 눈물을 이해하게 된다. 아-, 자신만 믿고 위험한 상황에 뛰어든 여자의 죽음. 블랑은 얼마나 미안하고 슬플 것인가. 근데 웃긴 건 그 눈물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 마저도 결과적으로는 모두 오해였다는 것이다. 사실 카산드라, 그러니까 헬렌은 죽지 않았고 블랑 또한 슬픔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의 일환으로 울었다는 것. 영화는 이렇게 몇 번이나 관객들을 가지고 논다. 그런데도 관객된 입장에서 기분 나쁘지가 않다. 관객들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은 미스테리 장르물로써 어마어마한 장점이고, 또 관객 입장에서도 그 모든 속임수들에 납득이 가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이브스 아웃>에 이어, <글래스 어니언> 역시 공조 영화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블랑은 분명 셜록 홈즈나 포와로 못지 않은 훌륭한 탐정이지만, 혼자서 모든 것들을 해결하진 않는다. 못하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하다. 그는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를 넘어, 결국엔 선을 이룩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이란 건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측정되는 요소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블랑은 헬렌과 함께 두번째 공조를 효과적으로 이뤄내고, 헬렌의 이같은 면모를 통해 영화는 이야기가 품고 있는 메시지를 확장시켜낸다. 미래를 위해 진실까지 속여내는 위선의 힘과 간악함. 그 모든 것들을 헬렌은 블랑의 도움을 통해 모조리 부수고 불질러 내는 것이다.
전편 이야기를 하며 전통있는 고딕적 분위기의 후더닛 영화임에도 스마트폰이나 SNS 등 현대적 요소들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단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건 이번 <어니언 글래스>도 마찬가지다. 시작부터 코로나 19로 인한 판데믹 상황을 상정하고 가다보니, 극중 인물들이 상황에 따라 마스크를 쓰고 나온다. 그리고 이걸로도 캐릭터를 잘 표현해내고. 어떤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마스크를 쓰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아예 안 쓰거나 망사로 된 마스크를 쓰며 그 멍청함을 드러낸다. 셜록 홈즈와 포와로, 앨러리 퀸, 매그레 경감 등이 모두 명탐정임에도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머물러 있단 걸 생각해보면 이 블랑 이야기들의 매력이 새삼 눈에 띌 것이다.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들려면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중언부언 미사여구 붙일 것 없이 그냥 기본기를 끝내주게 잘해내면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 영화. <브릭>으로 시작되었던 라이언 존슨의 미스테리 본능은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개화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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