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5 11:03

유령 극장전 (신작)


<유령>의 기초 설정은 참으로 힘있다. 일제강점기의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라고 하길래 <암살> 같은 영화인 줄 알았지. 허나 영화는 의외로 후더닛 장르에 기대고 있었다. 명탐정이 고립된 외딴 호텔에 주요 용의자 다섯명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시작된 범인 찾기. 명탐정 뿐만 아니라 주요 용의자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기에 이르고, 나중엔 각자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명탐정 못지 않게 열심히 진범 색출에 가담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령>의 진짜 매력은 그 모든 걸 반대로 꼬아 놓았단 거다. 명탐정 역할은 조선으로 새로 부임한 신임 총독의 경호대장인 일본인에게 돌아가고 그가 찾는 진범, 즉 '유령'은 가상의 항일 투쟁 단체인 흑색단의 첩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의 입장에서는 명탐정이 악당이고 진범이 주인공인 서사가 되는 것.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촉발되는 서스펜스와 스릴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를!


---스포가 이 안에 있다---


고기도 자꾸 뒤집으면 안 익는다고 했다. <유령>이 딱 그 짝이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 전혀 다른 장르와 색을 취하며 나뉜다. 전반부는 앞서 기대감을 표출했던 후더닛 영화로써의 전개이고, 나머지 후반부는 갑작스런 액션 장르 영화로써의 변주다. 둘 다 잘 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에 가깝지만, 일단은 전반부의 후더닛 장르 전개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긴장감이 살지 않는다. 곳곳의 세부 설정들부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제일 대표적인 게 주요 용의자들의 행동 반경이다. 대체 왜 경호대장인 카이토는 주요 용의자들의 동선을 제한하지 않는가? 고립된 호텔로 몰아넣었으면 끝인가? 명탐정 역할을 부여 받았으면 명탐정답게 그들 뒤를 캐면서 추리를 해보든지, 아니면 간악한 일제의 대표주자이면 또 그답게 한 명씩 끌어내 고문으로 때려잡든지 하는 게 상식적인 것 아닌가? 지금의 카이토는 그저 호텔로 모두를 데려왔을 뿐, 그 안에서 용의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중간중간 부하들이 용의자들을 옥죄며 함부로 이동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무라야마 쥰지나 박차경 등등 모두가 신나게 돌아다님. 이게 맞냐?

용의자들이 금방 솎아진다는 것 역시 문제다. 일단 이하늬가 연기한 박차경은 처음부터 유령으로 대놓고 지목되기 때문에 벌써부터 진범 확정. 그렇담 나머지는? 설경구의 무라야마 쥰지가 조금 헷갈리게 하지만, 오히려 그런 강압적인 스탠스 덕택에 더 유령에서 멀어지더라. 서현우의 천 계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인물로만 보이고. 심지어 점까지 치잖나.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항일 투쟁 단체의 첩자란 말인가... 극중 안옥경도 말한다. 조선도 생각이 있으면 당신 같은 사람 첩자로 쓰진 않을 것 같다고. 그렇다면 남은 건 박소담의 안옥경이고, 실제로 이 인물이 별의 별 어그로를 다 끄는 만큼 만약 유령이 하나 더 있다면 필시 이 인물이겠구나- 싶어진다. 여기서 벌써 후더닛 영화는 실패인 거고. 

그리고 이어지는 액션 장르 영화로의 괴상한 변주. 동선으로 보나 액션의 합으로 보나 전혀 말이 안 되어 보이는 스펙터클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제아무리 훈련 잘 받았다한들, 안옥경 한 명이 그렇게나 많은 총탄들을 피해 혼자서 일본군 여럿을 금세 죽인다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영화니까 이해해달라고? 아니, 안옥경 캐스팅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샐베스타 스탤론이었으면 나도 이해하지. 근데 박소담이잖아. 그럼 완력으로 밀리지 않은채 일본군 10여명을 금세 도륙하는 액션 컨셉보단 좀 더 전략적이고 트리키한 쪽으로 가는 게 훨씬 설득력 있지 않았겠냐고. 

여기서 영화는 호텔을 벗어나는 자충수까지 둔다. 나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거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어야 했다고 본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 흑색단 vs 무라야마 쥰지의 일본군 구도로 가버리는데... 여기 액션을 잘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에필로그처럼 들어간 신임 총독 암살 장면은 이게 무슨 갑자기 <신 시티> 같은 장면인가 싶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성애자로 야릇한 텐션을 유지하는 일제강점기의 두 여성이, 한 자루씩 총을 쥐고 항일 투쟁을 해나간다는 그림은 누가 상상해도 대단했을 것이다. 분명 충무로가 군침 흘리고 눈독 들일 만한 이미지인 건 맞지. 그러나 그걸 이런 식으로 소비해 버린다면 그냥 그 이미지 하나 믿고 막무가내로 투신한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작이 어찌되었든 간에 이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후더닛 영화로 가는 게 맞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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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umic71 2023/01/25 12:53 # 답글

    좋은 소재였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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