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을 물들이는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처음엔 20대의 젊은 여성들만을 타겟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던 연쇄 살인. 하지만 살인이 계속될 수록 피해자들의 범주는 더 넓어지고 방식은 더 과격 해진다. 그나마 각 개별 사건들의 공통점은, 테드 번디처럼 일종의 스타가 되어버린 예전의 연쇄 살인범들 수법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는 것 정도.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건 강력반의 홍일점 형사 엠제이와 저명한 범죄심리학 교수 헬렌이다.
자아도취적인 연쇄 살인범, 그리고 그를 추적하는 형사 또는 탐정의 이야기. 이미 다 알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세고 셌다. 특히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점인 1990년대에는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이 영화가 개봉 되었던 1995년이 데이비드 핀쳐의 바로 그 <세븐>이 개봉 되기도 했던 해라면 말 다 했지. 그렇다면 <카피캣>이 연쇄 살인범을 다루는 스릴러로써 살아남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뻔한 큰 틀 안에서도 어떻게든 묘수와 잔재주를 부려보겠다는 일념 하나였을 것이다.
일단 두 주인공의 설정부터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1990년대, 그것도 경찰서 내부라면 강력한 유리천장이 작용했던 남초 사회 아니었던가. 그 곳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맥락을 잘 이해하고 노골적으로 활용하기 까지 했던 형사. 그리고 그와 짝패를 이루는 범죄 심리학자는 광장 공포증에 공황 장애를 앓아 집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태. 이 조합부터가 일반적인 양산형 할리우드 스릴러들 사이에서도 <카피캣>을 눈에 띄게 만드는 요소로써 작용한다. 집밖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심지어는 집안에서 조차 편히 쉴 수 없게 되는 헬렌, 그리고 그를 연기하는 시고니 위버의 강인하면서도 유약한 모습이 특히 눈길을 끈다.
이어서는 연쇄 살인범.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긴 하지만, 만약 살인 등의 범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 중에서도 유독 창의성을 뽐내는 살인범들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카피캣>의 연쇄 살인범은 영화의 제목대로 이미 '진정한 예술가'라 인정받은 선배 연쇄 살인범들의 수법을 그저 있는 그대로 모방하기만 한다. 사람 죽이고 다니는 주제에 창의성까지 없어 사소한 소품들의 위치가 틀어지는 것만으로도 강박적 고통을 받는 연쇄 살인범. 그 모습에 혀를 끌끌 차게 되면서도 장르적으로는 괜시리 더 흥미가 가게 된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살인 대상의 구두 하나가 살짝 틀어졌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화내는 건 진짜 좀 웃기지 않나. 장인이고 고수일 수록 어쩌면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는 강박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거늘.
정말 재밌는 건, 영화가 그 연쇄 살인범의 정체는 중반부쯤부터 그냥 드러내 버린다는 것. 물론 주인공 근처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장르적으로는 꽤 대담한 선택이었다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야기의 활력이 어느 정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상술했던 여러 장점들이 모두 함께 힘을 냈기 때문이겠지. 속칭, 먼저 패를 다 깠음에도 다져둔 기본기로 어느 정도 선방한 영화라고 하겠다.
덧글
잠본이 2023/01/26 08:53 # 답글
네로 울프와 아치 굿윈 생각나는 조합이군요.
rumic71 2023/01/26 14:44 #
잠본이 2023/01/26 1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