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전쟁이야 한국인인 우리네 입장에서는 그 당시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임한, 그야말로 살고 있던 세상이 뒤집어지는 그 무언가였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제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사이 애매하게 걸쳐있던 전쟁이었기에, 미국인들은 그 전쟁을 이른바 '잊혀진 전쟁'이라고들 부른다 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쟁이라니, 얼마나 슬픈가. 나도 한국인이었기에, 한국 전쟁에 임했던 미국인들의 상황이나 마음가짐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솔직히 말하면 별 신경 안 쓰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며 알게 된 건데, 한국 전쟁이 그저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리기엔 미국 전쟁사에서 여러모로 꽤 중요한 지점들이 있는 전쟁이었더라고? 냉전 시기 소련을 배후로 한 공산권과의 첫 물리적 전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종 분리 정책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직후 치른 첫 전쟁. 그럼 벌써 영화적으로는 이야기가 쫙 다 그려지지 않나? 특히 요즈음의 할리우드에서 군침 흘리기 딱 좋은 소재 아니냐고.
<디보션>은 아마, 그런 기획에 실화의 힘을 양념삼아 추진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미 해군내 유일한 흑인 파일럿 제시 L 브라운 소위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그 옆의 백인 윙맨으로 역시 실제 인물이었던 톰 허드너 중위를 배치해뒀다. 그 두 인물을 각각 조나단 메이저스와 글렌 파웰이라는 현 할리우드 블루칩 배우 두 명이 성실히 연기. 그런데 배경이 한반도이고 또 탈 것이 전투기라 그렇지, 그것들을 각각 미 남부와 자동차로 바꾸면 <그린 북>이랑 거의 비슷한 내용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실제 내용도 거의 그와 유사하다. 수준급의 실력을 갖췄지만 피부색 때문에 진정으로 인정받진 못하고 있던 흑인 주인공이, 그 당시 치고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던 백인 주인공과 함께 조금씩 삶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한다는 이야기니까 아주 다르다고는 할 수 없겠지.
이처럼 소재의 기획 자체는 잠재력이 있었으나, 그 나머지를 전형적으로만 풀어내서 <디보션>은 제 속도를 내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존했던 인물들을 무지막지하게 각색해야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불가능했으면 적어도 영화내의 리듬을 변주하거나, 아니면 장르적인 스펙터클로 좀 더 밀어붙여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싶은 거지. 현재 버전의 <디보션>은 전쟁 영화로써도 다소 밍숭맹숭하고, 사회적 차별을 다룬 사회 드라마로써도 너무 뻔하다. 그러다보니 그냥 재미없진 않은데 너무나도 평범하게 만든 교과서적 전기 영화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탑 건 - 매버릭> 직후 나온 전투기 영화이다 보니 관객들 입장에서 비교가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다. 이미 <탑 건 - 매버릭>이 너무나도 엄청난 전투기 액션들을 보여준 직후라 <디보션> 딴에는 조금 억울하기도 할 거다. 당연히 그 세대의 전투기와 <탑 건 - 매버릭> 속 현 세대의 전투기 사이 기동 차이를 단순 비교할 순 없겠지만, 어찌되었든 불리한 상황이었던 건 사실이니 연출적으로 커버 했어야 했는데 그걸 전혀 못하고 그냥 평이하게 간 모양새.
그냥 <탑 건 - 매버릭>에서는 얄밉게 나왔던 글렌 파웰이 여기서는 엄청 진중하고 나이스한 인물로 나와 그거 보는 재미 정도가 있었다. 조나단 메이저스는 MCU 통해 앞으로 근 몇 년동안은 꾸준히 볼 얼굴이라 적응 중.
덧글
잠본이 2023/02/02 17:57 # 답글
확실히 매버릭 때문에 전투기 다루는 영화들은 한동안 비교를 피할 수 없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