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여름방학을 맞이해 아빠와 함께 찾은 튀르키예의 한 호텔에서 며칠간의 휴가를 보내는 소피의 이야기다. 그 휴가에서 소피는 구질구질한 화질의 캠코더로 아빠와 스스로를 기록하고, 호텔 로비의 오락실에서 간간히 오락을 하며, 바다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물론 그 사이사이 소피가 아빠와 뜬금없는 신경전을 벌이거나, 호텔에서 처음 만난 한 소년과 첫키스를 나누는 등 그녀의 전체 인생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 중히 여겨질 지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애프터썬>은 일견 별 내용 없는 일종의 브이로그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 호텔에서 보내는 며칠간의 크고 작은 상황들이 영화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이야기'도 아니고, 단지 크고 작은 '상황'들.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도, 바로 그러한 지점 때문에 <애프터썬>은 기묘한 생명력을 얻는다. 한 편의 일반적인 서사를 갖춘 영화라고 하기엔 정말로 별 내용이 없고 또 설명조차 부족하므로 담백하다못해 싱겁다. 그러나 누군가의 과거에서 나른해 기억에 더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어느 한 조각을 이렇게 직접 목도하고 나니, 내 인생의 그런 순간들도 저절로 반추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애프터썬>은 딱 절반짜리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영화가 제공하는 것은 일반적인 다른 영화의 딱 절반 정도 되는 감흥. 하지만 거기에 보는 이의 옛 순간들이 또 딱 절반 감응하며 꽉 찬 한 편의 영화를 온전히 제공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기묘하다고 할 수 밖에는 없겠다.
튀르키예에 가본 적은 아직 없지만, 가족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여행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국내든 해외든 상관없이 말이다. 여름에 보냈던 그 몽롱하고 여유로운 순간들. 이렇다할 목적 없이 그냥 부유하듯 흘려보낸 며칠들. 각자의 관객들이 제각각 느낄 그 시간과 나날들이 <애프터썬>의 절반을 수식한다. 고로 영화는 굳이 수상해보이는 아빠의 행적과 비밀이라든지 따위에 별다른 조급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 현재 시점의 소피가 짓는 표정과 행동들을 보니, 여행 이후 아빠와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대략적으로 추측 되잖아. 영화는 딱 거기까지만 허용하는데, 그 지점이 생각보다 납득 안 가는 것은 또 아니라 그냥 넘어가게 된다.
유튜브의 브이로그 콘텐츠들이 다 그렇듯, <애프터썬>은 그 브이로그적 속성 때문에 무척이나 파릇하고 선연한 현실 감각을 얻어냈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 이 영화의 소피는 어쩌면 모든 아빠들의 꿈이자 로망 같은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 통하고 아이스러운 동시에 어른스러우며, 무엇보다 별다른 갈등과 싸움 없이도 한철 휴가를 함께 잘 보낼 수 있는 딸의 존재. 그거, 말이 쉽지 사실은 유니콘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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