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문도 금방 도는 좁아터진 섬 이니셰린에서,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친구 콜름이 어느 날 느닷없게도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최근에 딱히 싸웠던 것도 아니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재잘재잘 이야기 잘 나눴었는데.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고 하지 않았나. 뜬금없는 콜름의 절교 선언에, 마음 둘 곳 없어진 파우릭은 말그대로 지옥을 경험한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절교를 선언한 상대가 속시원하게 그 이유를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절교 선언을 당한 사람으로서는 그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게 된다.
고로, 주인공인 파우릭 못지 않게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콜름에게서 최소한의 납득이 될 만한 절교 이유를 듣고 싶어진다. 무언가 그럴 듯한 이유가 있겠지, 지금은 그냥 그러고 싶어졌다고 말하지만 영화 말미쯤에 가서는 콜름이 그 이유를 반전 마냥 이야기하겠지- 등등. 그러나 영화를 다 본 관객들이라면 이미 잘 알겠지만, 콜름의 그 헤어질 결심엔 그럴 듯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저 고요를 핑계로 파우릭 없는 여생을 선택했다. 고개를 아주 조금이라도 끄덕이게 할 만한 이유나 명분이 없는 다툼. 그리고 그 보이지 않던 수면 아래의 다툼은 잘려지고 던져진 손가락들과 철철 흐르는 피, 그리고 누군가의 허무한 죽음과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구체화되고 표면화 된다. 그리고 대개의 복수라는 게 다 그렇듯, 누가 먼저 시작 했었는지가 잊혀지며 머리와 꼬리의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
파우릭과 콜름 두 사람의 좁고 높은 갈등을 통해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니셰린이란 섬 바깥에서 펼쳐지고 있던 아일랜드 내전을 신비롭게 은유 한다. 내전. 동족상잔의 잔혹사. 그리고 치열하되 종국에는 그 싸움의 이유가 희미해지는 비극. 상처를 서로 주고 받은 두 명의 인간을 통해 마틴 맥도나 감독은 아일랜드 내전을 곱씹고, 또 그로 말미암아 인류사 전체를 관통시킨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잖아. 남과 북으로 갈라져 형제끼리 벌인 전쟁. 각자 믿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시작한 성전처럼 보이지만, 실상 군복 입고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들과 후방에서 집을 잃고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결국 그 이유까지 잊을 수 밖에 없었던 전쟁. 윗사람들만의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란 아랫사람들에게 이토록 잔혹하다.
이유 없고 명분 없던 두 사람의 내적 전쟁은 한 줌 종교의 빛으로 조차 구원할 수 없었다. 또 거기에 측은지심을 갖고도 제대로 바로 서 있던 공권력 역시도 애시당초 없었다. 사방이 바다로 막혀 도망갈 곳 없던 좁아터진 섬에서 벌어진 자기파괴적 분쟁. 어쩌면 이 지구 역시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저 좁아터진 변방 행성일 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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