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3 15:32

슬픔의 삼각형 극장전 (신작)


역사학자들은 말해왔다. 매춘부야말로 농부 못지않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진 <슬픔의 삼각형>은 그 마지막에 이르러 매춘, 그러니까 성매매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 준다. 물론 여기에서 쓴 '여실히'라는 표현이 높은 수위의 섹스 묘사를 담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슬픔의 삼각형>에 놀라울 만큼의 노골적인 섹스 묘사는 없다. 하지만 영화는 성매매라는 행위가 인류 역사 초창기 어떻게 발현 되었을까-를 상상해 꽤 그럴듯하게 묘사 해낸다. 매춘.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상대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고, 대신 물건 또는 화폐를 그 댓가로 받는 행위. 그리고 <슬픔의 삼각형>의 세번째 챕터 속 이 매춘은, 영화의 첫번째 챕터 속 패션 쇼의 문구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와 순차적으로 조응한다. 

그러니까 <슬픔의 삼각형>은 결국 돈과 자본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총 세 개의 챕터를 통해 이 돈과 자본의 개념을 순차적으로 확대해 나간다. 젊은 남녀 커플의 데이트를 짧막하게 다룬 첫번째 챕터는, 우리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며 가장 쉽게 맞닥뜨리게 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각자의 호주머니 속 돈에 관하여 비릿한 태도를 보여낸다. 왜, 솔직히 우리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경험 하지 않았나. 상대와 저녁 식사를 하는데, 그 계산을 두고 신경전 했던 경험. 그 상대가 연인이었든 친구였든 간에,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그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돈. 그깟 돈이 뭐라고. 하지만 그 그깟 돈 때문에 연인들은 싸운다. 또 누군가는 그 그깟 돈 때문에 상의를 탈의한채 다른 이들에게 평가받고, 또 언젠가는 그 그깟 돈 때문에 자리에서 밀려난다. 

이어 두번째 챕터는 좀 더 노골적이다. 고급 호화 요트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이 두번째 챕터는 첫 쇼트부터 우리의 눈길을 붙들어맨다. 마치 <007> 시리즈의 악역이 애지중지 다루는 비밀 무기가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란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샛노란색의 하드 케이스를 누군가가 품이 꼭 끌어안은채 헬기를 탄다. 이어 다른 물품 없이 그 혼자서만 덜렁 해상 위의 배에 전달되는 샛노란 하드 케이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그 안에는 조그마한 누텔라 크림 몇 개가 들어있을 뿐. 헌데 그 누텔라 크림이야말로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달디 단 미제 자본주의의 맛 아닌가. 그런데 그걸 주문한 건 막상 똥을 팔아 부를 축적한 러시아인이었다는 게 아이러니. 

이 두번째 챕터는 여러모로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야말로 구토와 설사가 난무하는 대난장판이 벌어지는데, 영화는 그 와중에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미국인 임에도 공산주의를 귀히 여기는 선장과, 반대로 러시아인 임에도 자본주의의 달달함을 잊지 않는 부자. '관대함'이란 개념조차 사서 즐기고 싶어, 다들 곤란해하는데도 굳이굳이 선내의 모든 선원들을 한데 불러 모아 강제로 워터 슬라이드를 타게 만드는 사모님. 누군가의 불편함은 또다른 누군가의 해고로 이어지고, 군수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영국인은 자신이 만든 수류탄에 의해 폭사 한다. 여기에 구토가 난무하는 선장 주최 파티 한 켠에서 유유히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덤. 부자들은 스스로도 연주할 줄을 몰라 기계에 의해 구현한 클래식 음악을 일견 즐기는 듯 하고,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토를 닦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헤드셋 안의 쿵쾅이는 락 음악으로 노동요를 대체한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 호주머니 속 돈에서 시작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으로 이야기를 옮겨 가다가, 약탈이 곧 직업인 해적들의 습격으로 인해 모든 이야기들을 일거에 초기화 시켜버리는 세번째 챕터로 이르게 된다. 돈과 지위, 신분 모든 게 박탈 당한 무인도에서의 생활. 자급자족이 핵심인 이 곳에서 조차, 유니폼을 입었거나 지신이 여전히 부유하다 여기는 백인 부자들은 흑인을 해적으로 몰고 아시아인을 하녀처럼 부리려 한다. 불도 피울 줄 모르고 낚시조차 할 줄 모르지만 여전히 대접은 받고 싶어하는 이 블랙 코미디적 상황이 웃기다 못해 우습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춘이 나온다. 사실상 섬의 군주가 된 아비게일은 생선과 프레첼을 주는 대신 칼의 젊은 육체를 탐닉한다. 배가 고픈 칼 역시 이에 응하고. 여기서 가장 재밌는 건 칼의 연인인 야야의 태도다. 그녀는 여전히 칼의 연인이지만, 자신 몫의 프레첼을 위해 칼의 매춘을 사실상 방관한다. 겉으로는 하지 말라 말하지만, 정작 그가 가져오는 프레첼은 짭짤하니 맛이 있단 말이지. 

칼에게 말하는 아비게일의 대사가, 어쩌면 이 영화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지 싶었다. 난처해하는 칼에게 아비게일이 말한다. "너의 그 말은 진실되어 아름다운 거야. 사랑을 줄테니, 물고기를 주세요-라는 그 말." <슬픔의 삼각형>은 아비게일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일체의 낭만 없이 모조리 뜯어낸 뒤 그 모든 걸 다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다. H&M도 웃기고 발렌시아가도 웃기다. 패션 쇼도 웃기고 해시태그도 웃기다. 한도가 초과된 신용카드와 택시 안에서의 싸움도 웃기고, 누텔라 크림과 워터 슬라이드도 웃기다. 구토와 설사는 당연하고 프레첼과 매춘도, 해적도, 뇌졸중도 모두 웃기다. <슬픔의 삼각형>은 그렇게 모든 걸 웃기고 우습게 만들면서도 그 모든 걸 다 진지하게 다뤄낸다. 그리고 아비게일 말마따나 영화의 그러한 태도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역겹도록 웃기고, 진실되어 아름다운 영화. 우리 모두 그 슬픔의 삼각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냥 이렇게 한 번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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